힘있는 운필 돋보이는 윤명로 '겸재예찬' 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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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흑갈색의 선이 가지 치듯 화면 가득히 펼쳐져 있다. 선은 수묵처럼 번지고 뻗어나간다.

선의 모임은 때로 항공촬영한 산맥같고 빈 공간은 동양화의 여백처럼 현기를 풍기기도 한다. 흙과 산과 바위의 기운을 담은 한국적 추상화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 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중진 서양화가 윤명로씨(64.서울대 미대 교수)의 '겸재예찬' 이다. (22일까지)

한국 전후 추상미술의 핵심적 인물인 윤교수는 1960년대부터 서구양식에 한국적인 내용을 담는데 주력해왔다.

이번 전시에선 겸재 정선의 정신을 현대적인 감각과 서양화의 언어로 재해석한 작품을 보여준다. 1백호~1천호에 이르는 대작 30점을 포함, 모두 60점이다.

작가는 "중국풍이 유행하던 조선 후기에 독자적인 한국 진경산수의 세계를 세워나간 겸재의 '인왕제색' (비 그친 인왕산)을 특히 좋아한다. 전시의 제목도 그의 정신을 이어 받자는 취지에서 정했다." 고 말했다.

"겸재야 말로 좌표를 잃고 떠다니는 현대작가들이 제대로 다시 연구해 볼만한 대상" 이라는 취지에서다.

이번 작품들은 채색재료로 쇳가루만을 사용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서양화에서 흔히 쓰는 아크릴은 비닐같은 얄팍한 느낌을 줘서 싫었다고 한다.

그 결과 찾아낸 것이 조선의 철사(鐵砂)백자에 쓰였던 산화철. 면포위에 흑갈색 단색조로 그려낸 작품들은 그래서 동양화의 분위기를 풍긴다.

힘있는 운필 역시 준법(주름으로 산이나 바위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기법)중 삼대 줄기가 갈라지는 형상의 피마준과 유사하다.

"나의 그림은 무작위한 것" 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추상화는 어떤 구체적인 형태나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림을 보는 관객은 맑고 투명하면서도 힘이 있는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작가의 평창동 작업실을 둘러싸고 있는 북한산이 내뿜는 기운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1970년대 중반 '균열' 연작.80년대 '얼레짓' 연작.90년대 '익명의 땅' 연작 등 대략 10년 주기로 화두를 바꾸어왔다.

그는 "이제서야 내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표작을 완성한 느낌" 이라고 말했다.

02-720-1020.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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