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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눈이 있는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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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어렸을 때 나는 눈이 오는 날을 무척 좋아했다. 당시 겨울이 깊어지면 도쿄에도 한두 차례 큰눈이 내렸다. 눈이 오면 나는 근처에 사는 아이들과 눈싸움을 하고 우리 집 마당에 눈사람도 만들었다. 눈이 많이 내릴 때면 눈으로 집을 짓기도 했다. 신기하게 눈으로 만든 집인데도 안에 들어가면 따뜻했다. 아이들은 폭설로 교통대란이 일어났다든가, 눈이 많이 내리는 설국에서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집이 무너졌다든가 하는 뉴스에는 개의치 않고 그저 눈을 가지고 노는 일을 즐겼다.

당시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천주교 학교여서 규율이 엄격했다. 그래서 남녀학생을 한 반에 넣지 않고 남학생과 여학생 반을 따로따로 만들었다. 학년마다 남학생 반은 한 반이고 여학생 반은 세 반이었다. 그런데 눈 내린 어느 겨울의 점심시간, 우리 남학생들은 다른 반의 여학생들에게 눈싸움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들은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남녀 학생들이 같이 어울린 적이 한 번도 없던 우리 학교에서 남녀가 교정에서 대대적으로 눈싸움을 벌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당시 우리는 5학년이었다. 그런데 여학생들 중에 꽤 힘이 센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우리 남학생들을 날카롭게 공격해 와서 남자아이들이 크게 당하고 있었다. 그 여학생이 외손잡이여서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그 학교 역사상 남녀 학생들이 함께 어울리는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선생님들도 처음 있는 일이긴 하지만 별로 나쁜 행동은 아니라고 여겼는지 우리의 행동을 묵인해주었다.

그 겨울에는 눈이 며칠간 내려서 매일 우리는 점심만 먹으면 곧바로 운동장에 달려나가 여학생들과 눈싸움을 즐겼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여학생들 몇 명이 울면서 교사(校舍)로 도망쳤다. 잠시 후에 여학생 반의 담임 선생님이 나오셔서 “눈 속에 돌을 넣고 던진 사람 나와!” 하며 화를 내셨다. 해프닝과 함께 그렇게 눈싸움은 끝이 났다. 우리 반 남학생 중 누군가가 작은 돌멩이를 눈 속에 넣어서 던진 모양이었다. 결국 긴급 학급회의가 열렸고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 담임 선생님이신 수녀님은 우리 반 아이 중에 누가 돌멩이를 넣어서 던졌는지를 추궁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이렇게 물으셨다. “앞으로 여학생들과 놀고 싶지 않은 사람 손들어봐.” 이 말에 놀랍게도 나만 뺀 다른 아이들은 모두 손을 들었다. 여학생들과 노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아이들까지 모두였다. 나는 놀랍다는 것을 넘어서 아이들에게 배신감마저 느꼈다. 다시 수녀님은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여학생들과 놀고 싶은 사람은?”이라고 물으셨다. 부끄러웠지만 나는 혼자 손을 들었다. 결국 우리는 그 후로 다시는 여학생들과 놀지 못했다.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아이들의 눈싸움하는 모습을 보기 드물다. 그런 놀이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눈 오는 날이면 어렸을 때의 추억들이 풍경화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특히 펑펑 함박눈 내리는 초등학교 교정에서 온 세상이 하얗게 덮여가는 속에서 눈송이 사이로 우리가 힘차게 눈을 던지는 모습이 환하게 떠오른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일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