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난 북파 공작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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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일 민주당 김성호(金成鎬.통일외교통상위)의원이 6.25 전후 북파(北派)공작원 3백66명의 명단을 최초로 입수, 공개함에 따라 최근 남북관계와 관련해 파문이 예상된다.

'남파간첩' 과 대칭되는 북파 공작원은 6.25 직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특수임무를 띠고 북한지역에 파견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金의원과 관계당국에 따르면 이들의 주임무는 중요시설 폭파.후방교란.기밀수집 등 다양하다.

주요 관공서나 군부대에 잠입, 비밀문서를 빼오거나 휴전선 부근을 넘나들며 북한군 장비를 획득해 오는 일이 일반적인 임무였다.

이들을 선발.양성한 부대는 'HID' 로 불리는 육군 첩보부대가 모체인 것으로 알려졌다. 1948년께 창설된 이 부대는 전쟁 당시 약 30개의 부대를 운영하기도 했다.

전쟁 중엔 군인 신분으로, 휴전 이후에는 계급과 군번도 없는 민간인 신분으로 북파됐다.

이후 공작원 양성기능은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 직후 창설된 공군 특수부대를 거쳐 국군정보사령부로 이어졌다.

1971년 서해안 실미도에서 특수훈련을 받다 부대를 탈출, 서울 진입을 시도하며 군.경과 교전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金의원 공개자료에 따르면 1953~56년 초창기 북파 공작원들은 77% 정도가 이북 출신이었다. 이는 "초기에는 혈혈단신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 위주로 편제됐다" 는 관계자의 증언과 일치한다. 공작원 연령은 20대가 가장 많았으나 14세 이상 10대 소년도 27%나 됐다.

북파가 중단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전까지 북한에 잡히거나 실종.사망한 공작원은 모두 7천7백26명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현상은 고도의 과학적인 훈련없이 투입되곤 했던 50년대에 주로 나타났다. 60년대부턴 선발방식도 바뀌었다.

체력, 투철한 대공의식 등을 평가했고 3~4년 계약방식에 성과급이 지급됐으며 공작 후 군에 특채되기도 했다.

정보사는 이들의 개인신상.계약(선발)및 해고(실종)일시.작전성과 등을 담은 마이크로 필름을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파 공작원 가족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온 몸을 던진 사람들" 이라며 생사확인과 국가차원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60년 이후 활동했던 공작원들은 현재 적용이 불가능한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의 개정을 외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은 공식적으론 "시인도, 부인도 할 수 없다" 는 입장이다. 이들의 실체 인정은 곧바로 정전협정 위반을 자인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론 "문제가 제기된 만큼 이제는 올바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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