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한국통신위성운용단 황보한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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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노랫말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에서 구만리는 아스라히 텅 텅 빈 가을 하늘을 상징한다.한반도 상공 실제의 구만리 곧 3만6천km 상공에는 우리의 무궁화 위성 2호·3호가 떠 있다.

무궁화 위성은 지구의 자전 속도와 일치해 돌기 때문에 한반도 상공에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무궁화 위성을 이용한 위성방송 사업자 선정이 곧 끝나면 우리나라도 내년부터 본격적인 다채널,쌍방향 TV 시대가 펼쳐진다.

채널수가 80개 가량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채널 시대의 시청자들은 이제 ‘기러기 울어예는’이 아니라 ‘무궁화 위성 도는 하늘 구만리’로 한번쯤 바꿔 불러 무궁화 위성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도 위성방송 시대의 예의가 될 법 하다.

황보한(皇甫漢·62·한국통신 위성운용단 단장)박사는 우리나라 인공위성사업의 개척자다.직업이 일정하게 사람사는 방식과 사람의 성격까지 만든다더니 그를 만나고 난 느낌은 그가 무슨 위성 같다는 것이었다.

통신위성이 구만리 적막 상공에 홀로 떠 자신의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소임을 수행하듯,그는 미국의 국방부 산하 통신위성 감리 기관인 MRJ 책임연구원 자리를 마다하고 89년 연말 홀로 귀국해 이제 감회어린 눈으로 우리의 위성방송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무궁화 위성의 수명이 10년인데 그가 현직을 맡은지 올해 이 달로 딱 10년인 것도 그의 삶을 위성처럼 느끼게 한다.미국에 가족을 두고 온 독신의 10년 동안 그는 오직 위성 제작·발사에만 매달렸고 이제 위성이 제 삶을 구가하려 할 지금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일환인지 그는 최근 1945년 해방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관찰한 우리의 역사를 ‘별들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장편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별들의 만남’이란 우리의 무궁화 위성과 북한의 대포동 이성이 서로 만나 통일을 한다는 뜻으로 그는 이 책에 그동안 말로 못한 과학자의 애환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는 몇 년 뒤 은퇴하면 과학자로 보다는 화가로 불려지기를 원한다.20여년전 한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그리기 시작한 유화 실력이 지난해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질만큼 상당한 경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통신위성을 자식처럼 여기며 화폭에 조용히 자신의 심안(心眼)을 표현하는 과학자의 모습에서 어떤 쓸쓸함이 엿보이는 건 그가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한데다 그의 직업이나 취미가 신나는 광장의 일이 아니라 고적한 개인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그는 과학자답게 ‘최적화(最適化)의 원칙’에 따라 집수리도 직접하고 요리도 손수해 홀로 먹는다.

-무궁화 위성이 본격 가동되면 우리 생활에 많은 변화가 오지요.

“지하통신망을 안깔아도 안테나와 수신기만 있으면 TV·통신·인터넷·팩스·전화까지 다 할 수 있습니다.특히 초고속 인터넷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받았는데 미국 것보다 기술이 더 좋다는 평가를 받아 앞으로 수출 전망이 밝은 것이 큰 보람입니다.”

-위성 개발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지요.

“미국에서 기술을 도입하려고 했지만 기술료가 너무 비싸고 성능도 기데에 못미쳤어요.그래서 독자 개발을 하다 보니 전문인력도 부족하고 표준화 작업도 새로 해야 해 애를 태웠지요.어쨌든 이런 기술을 가진 나라가 7개국쯤 되는데 우리 것이 제일 낫다는 평기를 얻었습니다.”

-무궁화 1호 발사 땐 보조 로켓트 1개가 분리안돼 돈만 날렸다고 욕을 먹었지요.

“그 때 위성이 7만5천리만 올라갔어요.그래서 자체 기술로 개발한 위성에 내장된 연료를 써서 목표한 9만리까지 올렸습니다.그 때문에 수명이 절반으로 줄어 5년이 되어버렸지요.

그러나 내장 연료 기술만도 대단한 것인데 이를 평가해 주지 않아 내심 무척 섭섭했습니다.그런데 이 무궁화 1호가 결과적으로 효자 노릇을 했어요.프랑스의 유로스타라는 회사가 1호를 1백10억원에 임대했거든요.”

-수명이 다한 통신위성을 무엇때문에 빌려갑니까.

“어느 나라든 자기네 상공에 위성 궤도를 확보하려면 못쓰는 중고 위성이라도 갖다 놓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합니다.그래서 빌려갔어요.

1호가 한 효자 노릇이란 또 분리 안된 로켓트 때문에 보험료를 다 받았고,우리로서는 기술을 한 번 더 쓸 수있는 기회도 얻었으니 운이 좋았지요.”

-위성 궤도는 한 나라에서 몇 개를 쓸 수 있습니까.

“3개입니다.1궤도에 2개씩 위성을 올릴 수 있으니 6개의 위성을 확보할 수 있지요.우리는 2003년에 4호를,2006년에 5호를 쏠 예정입니다.닷컴회사 방송사 등에서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벌이는 추세여서 위성이용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지요.”

-통신위성과 인연은 어떻게 맺게됐습니까.

“57년 대학 3년때 (서울대 화공과)당시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고 그 후 미국이 따라 가는 걸 보며 매력을 느꼈어요.61년에 한국과 독일의 경제 협력 차원에서 정부에서 유학갱을 뽑았는데 거기 선발된 것이 본격적으로 인공위성 기술을 배우게 된 계기였습니다.

독일의 고온연구소 인공위성 개발팀에서 인공위성에 전기를 공급하는 소형 원자로 설계에 참여했습니다.그 경험을 살려 ‘우주비행체 방열기 설계’라는 논문을 독일 연구지에 발표했는데 이 논문이 66년 미국기계공학회지에 전재되면서 미국 코넷티커트 대학에 초청장을 보냈어요.거기서 2년만에 박사학위를 받았지요.”

-그 길로 쭉 미국에 머무셨는데 위성과 관련된 일은 어떤 것을 했습니까.

“첫 직장이 페어차일드 우주항공사였어요.71년에서 78년까지 NASA의 첨단통신위성의 열설계를 맡았습니다.

그 때 2차대전 때 독일에서 V2 로켓트를 개발한 폰 브라운 박사가 부소장으로 와 있어서 같이 일했는데 나중에 ‘페어차일드 2단 3단 로캣트’로 명명된 로켓트를 개발해 미 해군,공군에 납품한 것이 기억납니다.그러다 자리를 미 국방부 통신위성 감리사인 MRJ로 옮겨 89년까지 일했지요.”

-초대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소장으로 귀국하게 된 동기는 뭐였습니까.

“1980년 무렵에 재미과학기술자협회라는 걸 만들어 한국에 기술 전수 방법을 논의하고 발표 논문도 보내면서 관계를 맺었습니다.그러다 당시 국네에서 항공우주촉진법이 제정되고 이에 따라 한국기계연구소 안에 항공우주연구소가 생겨 귀국했습니다.밖에서 배운 기술을 국내에 전수하고 싶었지요.”

-연봉도 박했을 텐데요.

“미국에서 받은 것의 3분의 1도 안돼 주위에서 뭣때문에 가느냐고 말리기도 했어요.그러나 내가 팡료하다고 그런 자리를 주는데 돈으로 따질 일이 아니지요.”

-우리나라 로켓트·인공위성 기술은 어느 정도이ㅂ니까.북한 미사일때문에 미국 정부가 미사일요격망을 구축한다고 하는데요.

“북한은 아시다시피 98년에 한 미사일 발사에서 2백km쯤 날아가는 시위를 했지요.그 때 쏜 게 내 생각에는 위성같은데 궤도 진입은 실패한 걸로 짐작갑니다.

우리는 전자 기술이 좋아 5년 이내에 인공위성 분야의 국산화율이 50%정도까지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로켓트 경우는 미국이 중심이 돼 각국의 로켓트 개발을 억제하는 MTCR 규정이란는게 있는데 이게 최근 한국의 개발에서는 완화돼 2005년쯤에는 우리도 자체 기술로 소형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로켓트를 ㄱ발하고 있습니다.”

-과학자가 그림을 그리는 게 좀 신기하게도 보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과학자이자 화가였습니다.과학과 예술은 유연한 사고로 본질을 찾는다는 점에서 서로 통합니다.아인슈타인도 바이올린을 즐겨 켜지 않았습니까.

사실 그림은 우연히 시작했고 또 내가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노력을 하니까 엉터리는 아니다라는 소리를 듣게 됐을 뿐입니다.”

-스케치를 하거나 작업 할 때는 혼자 다니십니까.

“혼자 다닙니다.출장이 잦은 직업이라 여행이 취미가 됐어요.자연히 이 곳 저 곳의 풍광이 남다르게 느껴지고 해서 이걸 한 번 화폭에 옮겨야겠다라는 마음을 실천한거지요.

요즘은 나이가 들어 그런지 가령 산을 그릴 때 전에는 산 바같에서 산 전체를 그렸는데 지금은 산 안에 들어가서 바같을 쳐다보며 그리지요.”

그는 미국항공우주학회 평의원이다.국내 과학자 중에 아마 혼자 일거라고 한다.학교가 아닌 기술현장에서 일했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학술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매년 1-2편씩 논문을 써 모두 50여편을 발표했다.그러면서 요즘 현장의 젊은 연구자들은 논문을 잘 안쓰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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