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자격증 준비 … 방학이 더 바쁜 예비 대학생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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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 수시합격생들이 겨울방학을 이용해 예비대학 강의를 듣고 있다. “남들보다 먼저 학점을 이수해 유리한 위치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겠다”는 각오다. [최명헌 기자]

“대학 합격한 거요? 시작일 뿐이죠. 좋은 직장에 취업하려면 토익 만점은 기본이고, 전공 관련 자격증도 몇 개는 따야 된다고 들었어요.” “수시 합격통지 받은 날부터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선배들이 ‘경쟁에서 이기려면 고등학교 때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대학에 들어가면 놀아도 된다’는 얘기는 이제 옛말이다. 계속되는 경제위기와 청년실업 문제로 요즘 대학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도서관으로 향한다. 토플·토익·텝스 등 영어시험과 각종 자격증 취득 준비로 바쁘다. 1학년 때부터 학점관리를 하느라 수험생 시절보다 더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다.

올해 입학하는 새내기들의 생각을 듣기 위해 예비대학이 열리고 있는 아주대학교를 찾았다. 지난해 12월 28일부터 오는 28일까지 4주간 실시되는 이 수업엔 200여 명의 수시합격생이 참가하고 있다. 학생들은 “입학 전 최대 6학점을 이수할 수 있어 남들보다 한 발 앞선 입장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신청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합격의 즐거움과 진로 고민으로 희비가 교차하고 있었다.

공부

13일 오전 10시 아주대 성호관 305호. 영어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2명씩 조를 이뤄 해외여행과 관련한 대화문을 만드는 수업. 영어로만 진행되는 수업이 생소한 듯 20여 명의 학생은 강사의 질문에 수줍어했지만, 조는 학생 하나 없이 열중하고 있었다.

수시1차 지역인재우수전형으로 전자공학부에 합격한 박주희(서대전여고 3)양은 예비대학 수업을 위해 한 달 동안 학교 기숙사에서 머무른다. “방학 동안 친구들과 여행 다닐까 생각도 했지만, 정시 합격생들에 비해 영어실력이 모자랄 것 같다는 생각에 영어수업을 신청했어요.” 처음에는 수업만 들으면 될 것 같았지만 각종 과제를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는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도서관으로 향한다. 2학년 때 해외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뽑히는 게 목표인 그는 1학년 때부터 철저히 학점관리를 할 생각이다. 이를 위해 1학년 1학기 때 배울 물리와 수학과목 서적을 구입해 예습도 한다.

예비대학에서 영어와 수학 강의를 듣고 있는 서용경(수원 화홍고 3·자유전공학부 입학)군은 수시합격 통보를 받은 다음 날부터 온라인 토익 강좌를 듣고 있다. 매일 오후 3시 예비대학 수업이 끝나고 귀가하면 하루 3시간씩 강의를 듣고 복습한다. “1학년 후반까지 우선 영어라도 완벽히 끝내놓을 생각이에요. 원서로 된 교재도 읽어야 하고 취업준비 과정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이죠.” 토요일 오후 친구들과 축구를 하는 것 외에는 매일 자정까지 집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점심시간엔 도서관에서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한다. 서군은 “도서관에 가면 예비대학 강의를 듣는 수시합격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며 “‘대학 가면 논다’는 말은 상상할 수 없는 얘기”라고 말했다.

고민

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취업’ 문제였다. 이날 낮 12시30분 기초화학 수업을 듣는 23명의 학생 중 21명이 “대학에 합격한 후에도 취업 등 진로문제 때문에 잠을 설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각종 조립품을 만드는 것을 좋아해 건축학부에 진학한 나동찬(수원 효원고 3)군은 얼마 전 건축학부 2~3학년 선배들과 만난 뒤 고민에 휩싸였다. “건축사 자격증 경쟁률이 엄청나다고 들었어요. 자격증 취득이 힘들다고 느끼는 선배들은 건축공학과로 전과해 입사시험 준비를 시작한 경우도 많더라고요.” 선배들과의 만남 이후 나군은 계절학기 등을 활용해 최대한 빨리 졸업학점을 이수한 뒤 건축사 준비에 올인하기로 했다. 동아리 활동뿐 아니라 친구들과의 술자리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지난달부터는 영어 회화학원에 등록해 매일 2시간씩 회화공부를 한다. 또 일본의 건축기술이 뛰어나다는 말에 일본드라마를 보며 일본어 공부도 병행하고 있다. “고등학교 3년으로 진학하는 대학명이 바뀌듯, 대학생활에 따라 제 명함이 달라질 수 있잖아요. 조금 힘들더라도 대학 때는 공부만 할 겁니다.”

나군의 경우처럼 대부분의 학생이 “취업문제 때문에 2학년 때까지 전공 관련 자격증 3~4개쯤은 딸 것”이라고 말했다.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합격한 최정(광주 보문고 3)군은 “사정관 전형을 통과하기 위해 스펙을 갖춰나가듯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자격증 취득은 필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꿈은 뚜렷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세부계획도 확실했다. 항공우주선 제작이 목표인 우현수(과천여고 3·기계공학부 입학)양은 “1학년 때는 학점관리에 올인해 교환학생 선발자격을 갖춘 뒤 2학년 초부터는 토플을 준비해 1년간 교환학생을 다녀올 것”이라고 말했다. 또 “대학원은 미 항공우주국(NASA)과 협력관계가 있는 애리조나대에 지원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해 NASA에 들어간다”는 세부계획을 세웠다. 임석철 입학처장은 “입학사정관 전형 등에서 학생들의 학업계획서를 받아 보면 꿈과 목표, 진로계획이 뚜렷하다”며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확실한 목표를 세워 그 분야에 몰입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동아리 선택기준도 친목도모보다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거나 학업과 연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영어공부를 위해 회화와 토플 관련 학회에 들겠다”는 학생들이 가장 많았고, “자격증 취득 스터디 모임을 스스로 만들겠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우양은 “여러 가지를 잘하는 사람보다는 한 가지라도 확실히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캠퍼스 낭만에 심취해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꿈을 위해 한 시간이라도 아끼고 싶다”고 말했다.

최석호 기자, 사진=최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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