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인터뷰] 시드니서 만난 '상실의 시대' 작가 하루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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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어느 날 문득 나는 여행을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 에세이집 '먼 북소리' 에서 3년 동안이나 유럽을 떠돈 방랑의 변을 담백하게 피력했던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51). 스스로를 '상주적(常主的) 여행자' 라고 부르는 그가 올림픽의 향연에 이끌려 시드니를 찾았다.

그를 만난 것은 전혀 뜻밖이었다. 국내에서 발간된 책자에 실린 사진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임을 알 수 있게 한 징표는 반짝이는 두 눈이었다.

그는 올림픽 관련 다큐멘터리를 쓰기 위해 자료 수집차 경기장 곳곳과 시드니 전역을 쏘다니고 있었다.

그는 베스트셀러 장편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로 국내에 폭넓은 독자층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인생에 대한 짙은 허무와 고뇌를 노래해온 잿빛 시선의 작가에게 '지구촌 최고의 축제' 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지난 25일 올림픽파크 내 메인프레스센터에 마련된 중앙일보 부스에서 하루키를 인터뷰했다.

일본어 통역이 있었지만 그는 비교적 유창한 영어로 달변을 늘어놓았다.

그는 "경기장 출입이 가능한 ID카드 받기가 너무 어려웠다. 세상에 하루키가 필요하다는데 ID카드를 안주겠다고 하더라" 며 약간의 오만이 깃들인 너털웃음을 시작으로 말문을 열었다.

- 올림픽에 무엇하러 왔나.

"올해말 시드니 올림픽에 관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을 출간할 예정이다. 경기장의 분위기를 담기 위해 지난 9일 시드니에 와 낮에는 경기장을 찾아다니고 밤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올림픽이 끝나는 다음달 3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 개막식은 봤는가.

"한마디로 너무 길고 지루했다. 한정된 시간에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이 지나쳤다. 너무 지루해 덴마크가 입장할 때쯤 경기장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그리고 숙소 앞 생맥주 카페에 들러 맥주를 마시고 취해버렸다. 카페에서 TV로 입장식 장면을 잠깐씩 보았는데 그것도 재미있었다."

- 남북한이 손을 잡고 함께 개막식에 입장했다.

"일본에서도 남북 동시입장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개막식 도중에 나와버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한국인들의 꿈 가운데 하나가 이뤄진 것 아니겠는가. 무척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그는 "원더풀" 을 연발했다). "

- 경기 가운데 특히 관심이 가는 종목은.

"브리즈번에 가서 일본과 브라질의 축구 경기를 관전했고 올림픽파크 내의 야구장에도 갔었다. 그러나 정말 관심이 많은 것은 육상이다. 마라톤과 1만m, 트라이애슬론 등이 가장 보고 싶은 경기다'. 유도나 태권도 같은 격투기 종목에는 별 관심이 없다. "

- 육상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에세이에서도 자주 썼듯이 나는 트라이애슬론을 즐기는 아마추어 육상 선수다. 달리기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운동 아닌가. 달리기 하는데는 아무런 기구도 필요없다. 오직 자신과의 싸움만 있을 뿐이다. 치열한 싸움 끝에 얻을 수 있는 희열감은 안해본 사람은 느낄 수 없다'. 달리기의 묘미는 바로 그런 데 있다. "

- 올림픽이 중반을 넘었다. 어떻게 평가하는가.

"올림픽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이전의 올림픽을 보지 못해 비교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느낌을 말하자면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다. 사람도, 경기종목도 너무 많다. 종목 수를 좀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

- 바람직한 올림픽의 방향은.

"올림픽의 본뜻이 너무 변질됐다. 예를 들어 펩시콜라 상표가 붙은 제품은 경기장에 갖고 들어갈 수 없다. 올림픽을 지원하는 경쟁 회사의 입김 때문이다. 관중들은 또 너무 국수적이다. 경기장에 가면 "오지, 오지" (Aussie:호주인을 뜻하는 애칭)를 외치는 관중들의 비명소리만 들려 비위가 상한다. 금메달 수로 국력을 비교하는 듯한 태도도 잘못됐다. 스포츠는 스포츠 자체로 즐기면 된다. 스포츠를 가지고 왜 애국심을 들먹이나. 선수들이 메달을 딸 때도 국기 게양식 같은 것은 차라리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

- 시드니의 생활은 어떤가.

"교통이 너무 혼잡해 경기장에서 차이나타운에 있는 호텔로 돌아가기까지 1시간 이상 걸린다. 차이나타운에 숙소를 잡은 것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정말로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는 경기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보고, 필요하면 그때 그때 메모를 한다."

- 메모광인가.

"원래 메모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행히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기억력은 타고났다. 그리고 글쓰는 동안 동시에 생각을 한다. 이건 하늘이 준 재주인 것 같다."

시드니 올림픽 특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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