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386] 3. 386 "사회에 관심 보여라" 포스트386 "우리는 패러디로 풍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 1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자전거를 탄 채 대화를 나누고 있는 회계사 박춘원(39.(左))씨와 서울대 학생회장 홍상욱(24)씨. 두 사람은 16학번 차이의 선후배다. 변선구 기자

'태극기 휘날리며' 대(對) '반지의 제왕. 회계사 박춘원(39.서울대 자원공학과 83학번)씨와 서울대 학생회장인 홍상욱(24.경제학부 99학번)씨, 두 세대가 최근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는 달랐다. 박씨가 끈끈한 형제애에 감명받았다면 홍씨는 환상적인 영상에 감동했다고 했다.

1985년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에 참여했던 박씨는 현재 미국계 회사인 베인&컴퍼니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해'비운동권'출신으로 학생회장에 당선된 홍씨는 이념투쟁보다는 학내 문제 해결에 힘을 쏟고 있다. 16학번 차이인 두 사람은 지난 1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만나 자전거를 타거나 걸으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박춘원=20년 전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는 '독재 타도'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습니다. 학교 잔디밭에서 집회를 하면 순식간에 수천명이 몰려나왔죠. 뭉쳐야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이 강해진 겁니다. 대가족 제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점도 이런 성향에 한몫했죠.

▶홍상욱=요즘 집회에 참석하는 학생이 별로 없습니다. 탄핵 반대 촛불시위 때 수만명이 모이긴 했지만 일부 참석자들이 "왜 구호를 외쳐야 하느냐","플래카드를 들지 말라"며 반발하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 참여했으니 집단행동을 강요하지 말라는 거죠. 기회만 된다면 미국으로 유학 가서 뿌리 내리기를 원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보다는 외국계 기업을 선호하고요. 한국에서 취직 안 돼 걱정하기보다는 외국에서 직장을 갖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봐요. 이민 가는 것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만큼 국가보다는 '나'의 존재가치가 중요해진 거죠.

▶박=국가 없이 개인이 존재한다고 보는 건가요.

▶홍=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만 개인도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적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개인이 발전해야 국가도 발전하는 것 아닐까요. 이민을 가더라도 외국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다면 국위를 선양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박=국가가 잘 살아야 내가 잘살고, 회사가 잘돼야 내가 잘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선진 기업경영을 배우기 위해 회계사 일을 접고 미국계 회사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나 자신보다는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 결정한 일입니다. 우리는 직업을 갖는 데도 공익을 우선시했어요.

▶홍=포스트386은 자신의 '입맛'을 강조합니다. 직업 선택에 있어서도 공익보다는 개인 적성을 우선시하죠. 공익의 의미를 '나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희생은 있을 수 없죠.

▶박=공익은 거창한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실히 일하는 것이라고 봐요. 주변에선 요즘 젊은 친구들이 자기 일에만 신경 쓴다고 말하더라고요. 회식자리나 단합대회의 참석률도 저조하고요. 팀워크를 다지고, 회사에서 말 못 했던 응어리를 풀 수 있는 기회인데 아쉽습니다.

▶홍=상사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군대식 직장문화는 바뀌어야 합니다. 개인 의사는 묻지 않고 회식자리를 강권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룸살롱에서 아가씨를 끼고 민중가요를 부르는 386의 이중적 모습에 거부감이 듭니다. 평등과 민중해방이라는 '코드'만 남아 있을 뿐 기성세대와 별반 차이가 없는 행동이지요. 직장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은 불황에 따른 취업난이 원인입니다. 선배들께서는 들어가고 싶은 직장에 쉽게 취직했으니 충성심이 높겠지만 요즘은 자신이 몸바치고자 하는 직장에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예요.

▶박=화제를 돌려보죠. 저는 신문을 볼 때 스포츠.연예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386이 정치.사회 분야 전면에 나서게 되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정치.사회.경제 분야에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포스트386이 정치나 사회에 무관심한 것이 아쉽습니다.

▶홍=포스트386이 전혀 관심이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풍자 패러디 작품을 만들면서 정치인들을 꼬집기도 합니다. 이른바 '운동권'의 관심사도 여성.장애인.환경 등으로 다양해졌고요. 정치.사회에 무관심해지는 것은 우리의 목소리가 현실에 잘 반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대학의 역할도 바뀐 것 같습니다. 1980년대에는 대학이 맡아야 할 정치적 책임이 컸습니다. 그만큼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았고요. 그런데 포스트386은 토익.토플 책에만 매달리는 것 같아 안쓰럽습니다.

▶홍=취업이 어려워지다 보니 어쩔 수 없네요…(웃음). 학생들의 개성이 강해지면서 학생회의 성격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선동하는 '투사' 학생회장을 원했다면 요즘은 봉사하는 '일꾼' 학생회장을 선호하죠. 주변에는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애인과 동거하는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이혼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죠. 좋으면 같이 살고 싫으면 헤어지는 것이 요즘 세대입니다. 그만큼 감정에 충실해졌다는 얘기죠.

▶박=사회적 인식이나 원만한 가족관계를 고려해 이혼이나 동거는 피해야한다고 봅니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있는데 동거를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홍=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적인 가족제도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이혼이나 동거를 터부시하는 것 아닌가요.

▶박=만약 헤어진다면 다른 사람과 동거했다는 사실이 향후 배우자가 될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잖습니까.

대담이 끝날 무렵 두 사람은 서로의 세대에 당부했다.

▶홍=선배들이 80년대에 부르짖었던 부의 재분배, 노동탄압 문제에 대한 해결은 여전히 '먼 산'입니다. 사회 주류로 편입하면서 선배님들이 반자본.반미.통일 등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습니다.

▶박=포스트386의 눈에는 기성세대화하고 있는 386이 못마땅하겠지만 개혁이라는 것이 국민의 폭넓은 공감대를 얻어야 하는 만큼 시간을 갖고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정리=손해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