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가득한 무전여행 기록 '…라틴 여행 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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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쿠바 혁명의 주역인 전설적인 게릴라 체 게바라(1928∼1967).그가 혁명 영웅 체 게바라가 아닌 의대생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이던 시절에 쓴 라틴 아메리카 기행문이다.

8개월에 걸쳐 칠레와 페루·콜롬비아 등 남미 각국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을 적은 이 책에서 그의 혁명가적 체취를 기대한다면 아마 실망할 지도 모른다.사회불평등에 대한 울분과 소외계층에 대한 연민 등은 이 책에도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혁명가일지라도 그가 여행을 떠났던 스물세살이란 나이는 혁명에의 정열보다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흥분과 시들지 않은 감수성을 더 잘 보여주기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게바라에 대한 선입견을 털어버리는 순간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1일 생활권에 접어든 시대에 아직도 하루 24시간을 꼬박 비행기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남미로의 안내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니 않은 칠레 사람들의 친절’이나 포도주 등 각국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도 많다.

특히 잉카 문명의 수도였던 쿠스코에 대한 묘사는 그가 얼마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정체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게바라의 글을 통해 남미 문화를 접한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지만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의 기행 자체다.

게바라가 친구 형이자 선배 의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 한대를 타고 무모한 여행을 떠난 건 1951년 12월.고국 아르헨티나를 떠나 얼마가 걸릴지 모를 남미 여행을 감행했다.

그나마도 첫번째 여행지 칠레를 떠날 무렵 오토바이도 망가져 발품팔고 돈벌어가며 여행경비를 마련하는 무전여행을 하게 된다.잠옷과 외출복의 차이는 신발 뿐이고,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부풀려 말해 공짜로 술을 얻어 먹는 등 치기어린 행동들이 혁명가 게바라를 친근한 주위 인물로 만들어준다.

이 여행 전에 이미 혼자 자전거를 타고 아르헨티나 전역을 여행하기도 했지만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 치치나를 두고 고생스런 여정을 자청한 것은 단순히 그의 취미로 넘겨버리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여행인 동시에 현실의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종의 사회조사’라는 그의 아버지 말을 그대로 믿기도 어렵지만 어쨌든 이 여행이 질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닌 사회 병폐를 치료하는 혁명가로서의 운명으로 방향을 틀어준 것만은 분명하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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