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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두만강 대탐사] 1. 강은 대륙을 열고 있네 <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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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8면

강물은 맑고 맑아 하늘빛이 바칠 때면 청색으로 빛나고 산 그림자가 떨어지면 진초록을 띠고 있으니 그 빛깔이 청둥오리의 머리빛 같다고 압록(鴨綠)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설명없이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중국의 태평(太平)발전소,북한의 수풍(水豊)발전소를 지나 환런(桓仁)으로 향했다.환런은 고구려의 건국 도읍인 졸본성이 있던 곳으로 그 자취는 비록 훈강(渾江)댐에 잠겨 있지만 장대한 오녀산성이 남아있다.

오녀산성은 이름과는 달리 높은 산상의 우람한 바위절벽을 이용한 자연요새로서 그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일행 모두 “우아!”하고 탄성을 질렀다.

역사학자 송기호 교수의 말대로 고구려의 체취를 남김없이 느낄 수 있었다.이 고구려 산성은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삼국시대 산성 중에서도 으뜸의 위용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가 강건하고 웅대한 기상이 있었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랴마는 성내 지휘소인 점장대(點將臺)에서 바라본 드넓은 시계(視界)는 내 상상력의 옹졸함만을 탓할 수 밖에 없었다.

오녀산성을 내려올 때 우리는 삭도를 타지 않고 가파른 두 절벽사이로 난 일선천(一線天)으로 걸어내려가기로 했다.

하늘로 향한 외가닥 줄 같다는 이 낭떠러지 사잇길은,딛고 오르라 설치한 쇠사다리가 1백m도 넘게 아득히 뻗어 있어 보는 이마다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그러나 탐사대원 중 지질학자인 원종관 교수만은 전공다운 영탄을 발하였다.“이야!침식작용이 활발히 일어났구만.”

환런에서 우리는 고구려의 두번째 도읍지인 압록강변의 도시 지안(集安)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안은 고구려 극성기 4백년의 도읍으로 지금도 시내엔 국내성 성벽의 잔편이 처처에 남아있고,외곽엔 광개토왕비,호태왕릉,장군총,환도산성,그리고 우산하(禹山下)고군분,산성자고분군,마선향고분군 등 고구려 적석묘 수만기가 무리지어 있다.

그리고 달신과 해신이 만남이라는 벽화로 유명한 오회오분 다섯 기와 무용총,각저총,장천1호분 등 이제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의 반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 지안에 처음 온 사람은 경주에 첫발을 디딘 사람의 감격을 고구려적으로 확대한 것과 같은 감동을 느낀다.이런 지안을 탐사의 종횡기 몇마디로 그 장대한 모습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안에 대한 모독으로만 생각된다.후에 나는 별도의 장으로 다시 쓰게 될 것이다.

지안에서 압록강 줄기를 타고 오르면 강줄기가 동북방향에서 동남방향으로 급격히 꺾이면서 강변에 있는 린장(臨江)시가 나온다.압록강은 상류로 오를수록 더욱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곳곳에 정겹기 그지없는 강마을을 일구어 내고는 유유히 흘러간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강변에 ‘가든’(숯불고기집)과 ‘파크’(여관)한 채도 없는 것이 더욱 아름답게 다가왔고,강마을을 지날 때마다 만나는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에서 오염되지 않은 삶의 건강을 오랜만에 느껴 보았다.

린장시 건너편은 그 추위로 이름난 중강진(中江津)이다.건축가 승효상은 내게 조용히 설명했다.“국경의 도시는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단둥과 신의주,지안과 만포,린장과 중강진,창바이와 혜산.그러나 도시마다 서로의 성격과 기능이 있음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린장과 중강진은 정말로 지척에 있었다.그날은 바로 추석 둥근달이 긴 산자락과 함께 강물에 되비치고,북쪽땅 강변길에는 키 큰 포플러가 산마을의 가난한 등불과 길게 누워있었다.이종구 화백은 기어이 어둠 속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수묵의 산수를 그려 나갔다.

북한의 혜산(惠山)과 마주한 창바이(長白)까지 가는 길은 줄곧 압록강을 따라 나 있었다.비포장 흙길로 소형버스는 심하게 요동을 치며 흔들렸지만 그 아름다운 압록강의 자태에 취해 일행은 고달픔은 커녕 즐거운 마음으로 너도나도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누군가가 “뗏목이다”라는 소리를 질렀다.우리는 차를 세우고 모두 강가에 서서 두 척의 뗏목이 강물에 실려 유유히 내려오는 모습을 마치 흐릿한 옛 기억을 찾아낸 감회로 시선을 떼지 않았다.뗏목이 우리 앞을 지날 때 나는 빛바랜 인민복 차림의 뗏목사공에세 소리쳐 물어보았다.

“어디서 옵니까?”

“혜 에 산”

“어디까지 갑니까?”

“이 임 강.”

린장에서 혜산까지는 자동차로 10시간 거리.만주에서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는 린장을 기점으로 하여 두도구(頭道溝)를 시작으로 하여 23도구까지 있으며,창바이시는 19도구에 위치해 있었다.그 많은 지류 때문에 압록강은 상류에 이르러도 강물이 메말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어디쯤이었을까.우리는 강가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었다.압록강이 아름답게 감싸고 도는 강건너 북한땅에는 굴뚝이 기우뚱 달려있는 토담집 대여섯 채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강바람을 쐬러 강가로 나와 양말을 벗고 강으로 들어가 발 아래 비치는 자갈돌이 어른거리는 것을 하염없이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때 강건너 마을에서 한 아낙네가 빨래를 이고 나오고,동네 아이 둘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낯설게 쳐다보았다.나는 이윽고 30m도 안되는 강을 두고 말을 건넸다.

“반갑습니다.”

“어데서 왔습네까?”

“서울서 왔습니다.”

“거짓말 아닙네까.”

“정말입니다.백두산 가는 길 입니다.”

“삼촌 이름이 뭡네까.”

“유홍준.자네 이름은 뭔가?”

“성칠입네다.”

이때 빨래하던 아낙은 빨래를 연신 비비면서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마치 강건너 동네사람에게 말하듯 정을 듬뿍 담아 아이의 대답을 이어 받았다.

“강성칠이라요.강이 얼면 쉽게 건너옵네다.겨울에 오면 꼭 놀러오시라요.”

우리는 창바이시를 지나 압록강을 계속 따라 올라갔다.강폭은 점점 좁아지고 길 양편으로는

전나무와 이깔나무가 어두운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압록강은 시내로 변했고 북한땅은 손에 잡혔다.저너머 자작나무 숲을 지나면 거기가 백두산 천지이다.

유홍준 <영남대 교수.미술사>

[탐사단 명단]

◇ 국내 : 신경림(시인) 원종관(강원대 교수.지질학) 김주영(소설가) 유홍준(영남대 교수.미술사) 안병욱(가톨릭대 교수.한국사) 승효상(건축가) 이종구(화가) 송기호(서울대 교수.발해사) 김귀옥(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사회학) 여호규(전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고구려사)

◇ 현지 : 유연산(옌볜 작가) 안화춘(옌볜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독립운동사)

◇ 중앙일보 : 장문기(사진부 기자) 정재왈(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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