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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칼럼] 나는 제사가 좋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흉노족의 침공에 쫓긴 게르만의 '민족대이동' 은 476년 서로마제국 정복으로 2세기에 걸친 도도한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특히 반달족의 로마 점령에 절치부심의 수모를 느낀 당시의 지배층이 이교도 야만인에게 무릎 꿇은 패배의 분풀이로 반달리즘(vandalism)이란 말을 지어냈다면 나의 괜한 억측일까? 그만 하자. 어쭙잖게 서양의 고대사를 들추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우리의 민족대이동을 이야기하고 싶다.

*** 귀향, 세계화 시대의 역설

당국의 추산으로는 이번 추석에 2천6백만명이 움직일 것이라고 한다. 나라를 빼앗겨 국경을 넘는 변방 유민의 대열도 아니고, 일과 밥을 찾아 애니깽 농장으로 떠나는 식민지 노예선도 아니다.

누가 꾀지 않는 데도,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이렇듯 스스럼없이 이뤄지는 민족 이동의 굉장한 행렬을 나는 무연히 바라볼 수가 없다.

행여 어느 독재자가 시켰다면 아마도 폭동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엑소더스' 의 핍박도 없고, 반달리즘 따위의 약탈도 없다.

세계가 고향이라는 세계화 외침이 거셀수록 귀향의 대열이 점점 더 길어지는 현실은 정녕 세계화 시대의 역설이다.

하이마트로제(Heimatlose), 고향 잃은 떠돌이를 그렇게 부르던가□ 추석을 빌려서나마 그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원망을 되살리려는 몸짓을 나는 여간 반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1960년대 우리가 모신 국시의 하나가 '근대화' 였고, 그 깃발의 호소력은 오늘의 세계화 합창 못지 않았다.

농업 노동력을 대거 도시로 유인하는 공업화 과정에서 농촌 탈출(rural exodus)은 실로 거역하기 힘든 시대의 명령이었으며, 그 아프고 쓰린 상처의 흔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달동네' 를 기억한다.

세계 최장의 노동과 세계 수위의 산업 재해를 밑천으로 그 혹독한 굶주림의 공포에서 벗어나면서 우리는 이 메마른 도시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육중한 철근 콘크리트 문명의 속박과 그 황폐한 '인심' 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도시 탈출(urban exodus)의 꿈은 저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꾸겠지만, 그 해방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중당(中唐)의 시인 장적(張籍)은 1천2백년 전에 벌써 이렇게 읊었다.

낙양성에 가을 바람 부는 것을 보고

집에 편지를 쓰려니 마음이 무겁네

급한 마음에 할말을 잊었을까 두려워

나그네 떠나기 전에 겉봉을 열어보네

(洛陽城裏見秋風 欲作家書意萬重

復恐忽忽設不盡 行人臨發又開封).

서둘러 자동차 연료통을 채우고 고속도로 체증을 걱정하는 현대의 도회인에게 '임발우개봉' 따위의 애잔한 소회는 그야말로 계수나무 금도끼만큼이나 하품나는 '시절 첨지' 얘기로 들릴 터이다.

그러나 어쩌랴. 고향을 찾는 우리 마음에 그런 겸손과 정성이 깃들이지 않는다면, 귀향은 도시에서의 출세를 뽐내려는 또하나의 허영인 것을.

추석의 계절적 의미는 단연 결실이고 그에 대한 감사다.

그러나 거기 사람의 도리를 보태야만 이 축제의 내용이 한결 충실하게 되리라. 나를 낳고 길러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국 어미의 넉넉한 품에 안기는 것이다.

추석 대이동은 이런 귀거래(歸去來) 본심에 대한 내밀한 사죄이고 그 보상의 표현일지 모른다. 그게 비록 선조에 대한 성묘와 제사를 앞세워 후손들이 먹고 떠들며 즐기는 잔치판일지라도, 그 의뭉스런 계책이 밉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꿈에서조차 만난 적이 없는 몇대조 할머니.할아버지께 드리는 제사에 솔직히 무슨 효심이 그리 우러나랴?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조상이 소집한 자손들의 주주 총회, 죽은 이를 빙자한 산 사람들의 '그룹 미팅' 이 바로 제사이기에 우리는 그런 계기와 절차를 마련해준 선인들의 지혜에 감사해야 한다.

*** 산 사람들의 '그룹 미팅'

꽃 한 다발, 찬송가 한 번으로 끝내는 서양식 제사를 나는 굳이 탓할 생각이 없다. 단지 처삼촌 뫼의 벌초 같은 무늬만 성묘를 앞당겨 끝내고 추석 연휴에 질탕한 여행을 계획하는 약삭빠른 세태나, 제사 대행 회사에 '통과급' 메뉴로 - 효성보다 경제가 먼저다 - 2인분 부모 제사를 부탁하는 코미디 프로의 익살에는 더없이 씁쓸한 기분이 스친다.

제상 차리는 집의 부담과 차리는 사람의 수고를 난들 모르지 않으나, 그 야단법석의 소란이야말로 우리네 사람 사는 정리 아닌가.

받을 날이 멀지 않은(?) 녀석의 노망으로 여기겠지만, 글쎄 그래도 나는 제사가 좋다.

정운영 <논설위원>

[바로 잡습니다]

◇ 9월 8일자 6면 '정운영 칼럼' 에 나온 장적(張籍)의 시에서 '忽忽設' 은 오기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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