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나'를 돌아보지 않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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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누나, 내 원고 사보에 뽑혀서 원고료 20만원 받았어. 생전 처음 돈이 된 글, 그게 신기하고 대견해서 전화를 한 남동생이 뿌듯하다. 작은 기쁨으로도 많이 많이 행복한 우리는 '가족' 이다.

그저 끌리는 삶의 풍경들이 있다. 별 것 아닌 일들로도 거짓 없이 행복한 사람들의 경쾌한 웃음소리, 고단한 삶, 그 자체가 위로가 되는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한 삶이라도 삶이 그런 풍경 속에 있을 때는 얼마나 부드러워지는가.

부드러워서 튼튼한 사람들을 보면 함께 넉넉해지는 우리는, '사람들' 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나는 기억한다. 감격으로 부드러웠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표정을. 그것은 긴세월 돌고 돈 길, 평양거리에서였다.

그리고 나는 또 기억한다. 얼마 전 TV대담에 나와 정치를 말할 때 金대통령의 표정을. 모든 것이 국회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대통령은 야당에 대해 단호해 보이고 강경해 보였는데 자꾸 글쎄, 하는 회의가 드는 이유는 뭘까.

나는 장외투쟁으로 거칠어진 야당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회에서의 원칙' 만을 강조하는 민주당과 金대통령도 끌리지 않는다.

야당 총재시절, DJ는 여당이 부정선거를 자행했다고 등원거부 투쟁을 했다. 물론 그로 인해 꽤 오랫동안 국회는 개원조차 되지 않았다. 그 때의 여당인 지금의 야당은 또 얼마나 '국회등원 원칙' 을 강조했었는가.

왜 우리는 '나' 를 돌아볼 줄 모르는가. '나' 를 돌아보지 못하는 정치가 '너' 와 대화할 수 있을까. 정권이 바뀌고 세기가 바뀌었는데도 왜 정치는 그 때 그 시절에서 한치도 건너오지 못했을까. 왜 검찰은 여전히 편파수사의 시비에 휘말릴까. 왜 "정치검사는 아직도 있습니다" 는 전 고검장 심재륜씨의 말에 힘이 실리는가.

일제 총독정치 20년만에 형무소 생활을 한 조선인 숫자는 3명 중 한명꼴이었단다. '법치' 를 표방했던 일제, 그러나 언제나 그 내용이 문제였다.

만인을 범법자로 만드는 법을 가졌으니 권력은 얼마나 편한가. 편의에 따라, 기분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법은 그 법 아래 있는 이들을 비실비실 말리고 권력을 토실토실 살찌운다.

선거법 위반혐의로 입건된 국회의원 1백18명. 범법자들만 출마했는가, 법이 현실에 맞지 않는건가.

국회를 해산할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누구를 기소하고 누구를 무혐의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시비가 붙게 마련이다.

여론에 밀려 기소하더라도 힘있는 자의 경우는 중요한 위법사실을 빼고 사소한 사항으로 기소하는 '봐주기 수사' 가 자행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야당이 편파수사라고 흥분하는 대목이다.

대검 공안부는 5일 이들 1백18명 중 87명의 수사상황을 공개했다. 총선 수사현황 문건유출로 제기된 검찰과 민주당간의 사전조율 의혹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실언' 파동 등으로 검찰 수사에 대한 불신과 의혹이 커진 상황인데 그 의혹이 쉽게 가라앉을까. 더구나 그 문건은 검찰에서 유출된 게 아니라 여당을 출입하는 기자가 확보한 거라는데.

과연 그 문건이 여당에서 나왔을까. 여당에서 나왔다면 검찰 문건이 어떻게 여당으로 들어갔을까. 어쨌든 의혹의 진원지인 검찰이 이 문제를 처리할 자격이 있을까. 당연히 특별검사가 들어와야 하는 게 순리다.

16대 국회의 파행을 부른 것은 무엇보다 총선 민의를 왜곡시키려 했던 국회법 날치기였다. 이 파행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는 이유는 여당 지도부의 부정선거 시비 의혹이다.

날치기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특검제를 통해 '실언' 파동의 의혹과 함께 선거법 편파수사 의혹을 규명하겠다고 하는데도 야당이 장외투쟁을 한다면 그 때는 직무가 뭔지도 모르는 야당의원들을 아예 소환해야 한다.

그러나 의혹이 생긴 사건을 그저 덮으면서 어떻게 대화를 말할 수 있을까. 그 때의 대화란 강자의 자기주장일텐데.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은 오래 가지 않는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닉슨은 핑퐁외교로 '베이징(北京)을 방문하면서 '중국의 문을 여는 중요한 일을 했다.

중.미관계를 정상화시킨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한순간에 사라져갔다. 나는 바란다.

남북문제에서 예상 외 성과를 거두고 한껏 부드러워진 김대중호(號)가 국내문제로 좌초하지 않기를.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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