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흉보기 중독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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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공항 서점에서 우연히 한 유대교 랍비의 '상처를 주는 말, 치료하는 말' 이라는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자는 먼저 이런 물음을 던진다.

마약이 없이 살 수 없으면 마약 중독증이라고 한다. 술.도박.담배 등이 없이 살 수 없다면 그 또한 중독증이다.

남의 흉을 보지 않고 살 수 없다면 어떤가. 이 역시 중독증이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니 의식하든 못하든 남의 말을 많이 하면서 살아왔다. 입만 벌리면 남에 대한 평가다.

평가는 대부분 대상에 대한 약점 쪽에 집중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흉보기 중독증 환자인 셈이다.

요즘 북한의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만나고 싶어한다는 배우가 아프리카에서 찍은 사진첩과 관련해 출판사.사진작가.배우.매니저의 말이 각기 다르다.

국민으로부터 신망과 사랑을 받아 왔던 관계자들이 이제 와 서로 딴 소리를 하는 것은 배우와 그 가족들이 '남의 말' 에 의해 입은 큰 상처에서 비롯됐으리라고 짐작한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사진첩을 발간코자 했지만 사람들의 입방아에 질려 버린 것이다.

왜 우리는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할까. 세상사, 즉 사람들의 이야기를 빼놓고는 별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문제는 흉을 보거나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은 약점을 공개하는 데 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비판력과 분석력을 과시하고픈 본능이 있다. 한 대상을 택해 비판하고 분석하다 보면 자연히 결점이 부각된다.

인간은 본래 산이나 들이나 풀이나 나무처럼 별 것이 아닌 존재다. 그런데 특별히 사람만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 주장을 한다.

나무나 풀보다 사람이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면 그 자체가 부당하다. 그러니 사람에 대해 말하다 보면 '나' 를 내세우는 허물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또 남이 모르는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자기의 친교층이 다양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한다. 돈.권력.명예를 가진 사람들의 장점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려져 있다. 당연히 약점은 감춰진다.

그 약점 정보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람들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정보를 제공하는 이는 높이 평가되리라고 기대한다. 남의 흉을 봄으로써 자기의 능력이나 위상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뒤에서 남을 깎아 내리는 사람은 남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 스스로 이중성에 대한 자괴감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마련이다.

또 불안하다. 자신이 남의 말을 하니 남도 분명히 자신의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와 떨어져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자신의 흉이나 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게 된다.

일본인들과 대화를 해 보면 일등국민과 삼등국민의 차이를 절감하게 된다. 일본인들도 우리처럼 남의 말을 한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 이르면 딱 멈춘다. 남의 허물을 구체적으로 꼬집어 내는 일은 피하려고 한다.

일등국민이 멀리 있지 않다. 남을 나쁘게 말하지 않을 수 있으면 그가 바로 최고의 인격자다.

상대가 현장에 없더라도 말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등 뒤라고 해 함부로 헐뜯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남을 나쁘게 말하는 중독증을 치료해 보자. 남을 좋게 말하는 것은 돈 없이도 베풀 수 있는 최상의 보시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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