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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암기는 잊으세요

중앙일보

입력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엔 당대 미(美)에 대한 시각이 집약돼 있어요. ‘미’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보티첼리가 이용한 것이 바로 1대 1.618이라는 황금비였죠.” “그런데 왜 1대 1.618이 황금비가 됐을까?”

폭설이 내린 지난 4일 오전 ‘재미있는 느티나무 도서관(관장 이승희)’. 옹기종기 모여 앉은 ‘수상한 수학’ 회원들의 눈빛이 진지하다. 수학 공부 모임인데, 오가는 이야기는 미술 작품에 관한 것이다. "대학 합격 발표가 나자마자 가장 먼저 수학 교과서와 참고서를 내다버렸다"는 이유선(39)씨를 요즘 ‘수학 배우는 재미’에 푹 빠지게 한 모임이다.

명화 속에 수학이 있다

“예술은 논리적으로 따지거나 분석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예술의 밑바탕에 수학이 깔려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장문선(40)씨의 말이다.

8개월 남짓 ‘명화 속에 숨어있는 수학’을 통해 회원들은 뒤러의 ‘멜랑콜리아 1’에서 가로와 세로, 대각선 어느 방향으로 계산해도 숫자의 합이 34가 나오는 신기한 숫자판 마방진의 원리를 알아냈다. 앤디워홀의 ‘100개의 마를린 초상화’를 통해서는 행렬을, 호안 미로의 ‘붉은 태양이 거미를 갉아먹다’에서는 원주율(π)의 역사를 익혔다.

이 모임은 지난해 4월 초 시작됐다. 이 도서관 개관을 기념해 열린 ‘수의 세계’란 특강을 들은 주부들이 ‘본격적으로 공부해보자’며 하나둘씩 모이면서 출발했다. 현재 회원은 6명. 수학 전공자는 한 명도 없다. 그렇다고 학창시절, 수학을 좋아했던 이도 없다.

“수학의 근원을 따져가는 특강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수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는 게 이씨의 참여 동기다. 이 관장도 ‘수학은 단순히 숫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란 것을 깨달았단다.

결과 적용이 아닌 원리 이해가 우선

회원들은 요즘 컴퍼스와 자를 이용한 작도(作圖·도형 그리기)에 열심이다. 예전엔 작도를 통해 나온 결과를 배우고 외우는 데 급급했다면 지금은 실제 작도를 해봄으로써 그런 결과가 나오게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암기력이 떨어진다는 김정선(44)씨는 삼각형의 세 가지 합동조건도 그야말로 ‘체득’했다.

“자와 컴퍼스로 직접 작도를 해보니 왜 그 조건이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고요. SSS(세 변의 길이가 같다)·SAS(두 변의 길이와 그 끼인 각이 같다) 같은 공식을 달달 외울 필요가 없죠. 원리를 알고 과정을 밟아 결과를 내야 하는데, 거꾸로 결과를 적용만 하려니까 수학이 어려웠던 거였어요.”

김씨는 이어 “예전처럼 공식을 외워가며 문제를 푸는 공부였다면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라며 “여전히 연산 위주의 공부에 끙끙대는 아들(초등4)을 보면 학교에서도 이런 수업이 진행됐으면 싶어진다”고 말했다.

동화책에서 수학 찾기

얼마 전부터는 동화책에서 수학 찾기도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친숙한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수학적 사고를 길러주자는 취지에서다.

그 첫 번째 시도가 도서 『야광 귀신』에 나오는 ‘체(곡물·모래 등의 알갱이를 거친 것과 미세한 것으로 선별하는 용구)의 구멍 빨리세기’다. 회원들은 우선 긴 끈으로 원형인 체의 둘레를 재보자는 의견을 냈다. 이것으로 사각형을 만든 후 면적을 구하고 그 면적을 체 구멍 하나의 크기로 나누면 구멍 개수가 나올 것이란 예상이었다. 결과는 의외였다. 같은 길이의 끈으로 만든 원형과 사각형의 면적은 같지 않았다. 이런 자료를 모았다가 아이들을 위한 수학 동화책도 낼 참이다.

“20대 때 난시인 줄 모르고 지내다 안경을 맞춰 쓰고 보니 그동안 타원형인 줄 알고 지냈던 물체가 실은 원형이었더라”는 이 관장은 “요즘 그때 그 기분을 느낀다”고 전했다. 모임은 매주 수요일 낮 12시 30분에 진행된다.

[사진설명]‘수상한 수학’ 모임의 강사 김용관(中)씨와 회원들이 자와 컴퍼스를 이용해 도형을 그리며 즐거워 하고 있다.

▶문의= 031-972-5444

< 김은정 기자 hapia@joongang.co.kr >

<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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