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up] 토마스 린튼 LG전자 최고구매책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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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전자 최고경영자(CEO)인 남용 부회장이 2007년 말부터 밀어붙인 경영실험의 하나가 ‘C레벨’이라고 하는 부사장급에 외국인 6명을 영입한 것이다. 2008년 1월 최고구매책임자(CPO)로 스카우트한 IBM 출신의 미국인 토마스 린튼(52·사진) 부사장이 일례다.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서울 여의도 근무 3년째에 접어드니 이제 LG 사람이 다 됐다는 느낌이다. 책임감과 자긍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가 부임한 뒤 LG전자의 구매 전선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2008년 말부터 불어닥친 미국발 금융위기 속에서 지난해 강도 높은 비용절감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구매예산에서 계획 대비 1조원을 더 절감했다. 지난해 그의 손을 통해 집행된 구매비용은 무려 32조원에 달한다.

비용절감의 한 예로 지난해 초 연구개발부터 영업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150여 명의 인원을 모집해 태스크포스(TF)를 결성했다. 린튼 부사장은 “재료와 제품을 제외한 분야의 구매과정에서 얼마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지 찾아내고 개선하는 TF였다. 목표치의 65%를 초과 달성하는 바람에 임시조직을 정규조직으로 전환했다”고 웃었다.

지난해 8월 경쟁사인 삼성전자와 액정화면(LCD) 패널을 교차 구매하기로 양해각서(MOU)를 교환한 것도 린튼 부사장이 온 뒤의 ‘작품’이다. 그는 “삼성전자와 안정적인 LCD 패널 공급을 위해 전략적 제휴를 했다. 하지만 이후 패널공급이 달리면서 아직 거래실적을 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삼성전자에서는 이미 반도체를 비롯해 연간 2억 달러어치를 구매하는데 LCD 등 구매품목을 더 늘리고 싶다”고 말했다.

린튼 부사장은 구매에 대해 “배우기는 쉽지만 실천이 어려운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자재 가격이 오르기 전 일찌감치 사야 하고, 경쟁사에 비해 싸게 사야 한다는 교과서 내용은 배우기 쉽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게 각 사업부서는 물론 전 세계 지사에서 똑같이 통용되는 가이드라인이었다. 특히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LG전자 입장에서 일관된 가이드라인을 통해 협상에 나서면 보다 쉬운 실천이 가능해진다고 판단했다.

마침내 린튼 부사장이 11일 내놓은 것이 전 세계 LG 사업장에서 통용될 수 있는 ‘글로벌 구매방침서’다. 일반자재와 비품·소모품 등 모든 구매업무에 필요한 통일된 규정을 담았다. 이른바 ‘LG전자의 구매 헌법’이다.

1년간 각 사업부서의 구매 파트와 협의하고 외부 번역 전문기관과 법률전문가의 원고 감수를 거쳐 60쪽 분량으로 완성했다. ▶구매업무 정의와 역할 ▶구매업무 지침 ▶윤리규범과 행동지침 ▶사회적 책임과 역할 네 부분으로 구성됐다. 한국어와 영어로 발간돼 84개 해외법인과 115개 마케팅법인에 뿌려졌다. 내년까지 중국·스페인·독일어로도 번역될 예정이다.

린튼 부사장은 “투명하고 공정한 거래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LG디스플레이·LG화학 같은 계열사와 거래할 때도 특혜를 일절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명시했다”고 했다.

실제로 행동강령을 들춰보면 혹독하기 그지없다. LG전자 임직원은 퇴사 후 1년 동안 협력 중소업체에 몸담아서는 안 된다. “줄 수 있는 선물의 기준, 협력업체에서 뒷돈을 받으면 어떻게 징계해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을 적어 놨어요. 투명 공정 거래를 원하는 협력업체들이 반기는 표정입니다.” 지난해 말 갤럽과 함께한 설문조사에서 75%의 협력업체가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같이 일해 보자”는 남용 부회장의 권유를 받았을 때 처음엔 망설였다. 린튼 부사장은 “보수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LG전자에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게 뭔지 고민스러웠다”고 회고했다. “하여간 남 부회장은 다른 사람 설득하는 데 재주가 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

서울이 지내기 어떠냐는 질문에는 “국제도시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답했다. “교육과 의료 인프라에 문제가 좀 있지만 먹고 즐기기 좋은 도시”라고 덧붙였다.

심재우 기자

◆C레벨=최고경영자(CEO) 바로 아래 ‘C(Chief)’로 시작하는 최고경영진을 일컫는다. LG전자에서 쓰는 말이다. 이 회사에는 CFO(최고재무책임자)와 CTO(최고기술책임자)는 물론이고, CMO(최고마케팅책임자), CSCO(최고공급망관리책임자), CGTMO(최고유통채널책임자) 등 ‘C레벨’이 10명에 이른다. 대부분 부사장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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