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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두일 기자의 산을 오르며…] 아들아, 원시림이 되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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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아빠, 산에 오면 뭐가 좋아?"

글쎄, 그냥 걸으면서 보렴. 노고단을 넘어 돼지평원으로 가는 산길은 오솔길이네. 손잡고 가자. 원추리들이 참 예쁘지. 노란 꽃송이가 네 얼굴처럼 탐스럽구나. 저기 빨간 것들은 동자꽃이야. 꽃길이 꿈길 같다고 뛰어가려 하지 마. 지리산은 뜀박질하기엔 너무 큰 산이거든.

우아, 임걸령…. 사람들이 꽤 많군. 콸콸, 돌확에 샘물이 쏟아지는 걸 봐. 모두 물통을 가득가득 채우고 있어. 비가 온다고? 그래, 굵은 구름 알갱이들이 얼굴을 간지럽히는구나. 이런 비를 는개라고 하지. 저기 머리 위에 있는 반야봉이 더위를 참다 못해 구름으로 목물하는가 보다.

반야봉 허릿길은 상당히 가파른 돌길일거야. 오이도 깎아 먹으며 넉넉히 쉬어 가자.

네 번째…다섯 번짼가? 비가 되게 오락가락하네. 왜 그럴까. 햇빛도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맞아, 그거다.

비고 햇빛이고 연연해하지 않는 것. 지리산은 높아서 해를 가까이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직 엊그제 같은 지난날, 낮의 사람과 밤의 사람들이 여기서 드잡이했단다.

지리산은 그때도 무심했어. 역사의 태양을 가까이하고 있어 그랬을까. 네가 크면 한번 생각해 보렴.

저기 산줄기는 어디로 갈까. 구름 속으로 까마득하구나. 삼도봉에서 뻗친 불무장등 능선이야. 꼭 가보고 싶다.

높은 산은 끝자락을 한눈에 볼 수 없어. 두 발로 땀땀이, 오래오래 밟아 가야지. 겹겹이 파도치는 능선들을 다 탈 수 있을까. 어림없겠지. 못다 간 길은 네가 나중에 아빠 대신 걸으면 어떻겠니.

다리 아프다고? 바위에 앉자. 땀이 흥건하구나. 숨을 크게 들이쉬어라. 그리고 생각하는거야, 바람을. 저 아래 대성골에서 시작하여 골골샅샅이 훑어 올라오는 바람이거든. 높고 깊은 산, 그 큰 공기의 흐름을 네 허파꽈리 속속들이 느껴 봐. 서늘하지. 어때, 기운이 솟지 않아□

네 옆의 구상나무도 멋지네. 밑동서 우듬지까지 이끼 옷을 껴입은 거목이다.

가지들이 '앞으로 나란히' 하며 남쪽으로만 자랐어. 마치 거대한 얼레빗 같지 않니. 쏴, 하는 소리로 바람을 빗어 넘기고 있어. 숲이 빽빽해 빛 쬐기가 무척 힘들었을거야. 긴 세월 내내 햇빛을 그리워했구나. 몸을 빗으로 바꾸면서까지. 그리고 마침내 저리 곧게 하늘을 찌르는구나.

"빨리 집에 가 스타크래프트랑 포트리스 하고 싶어. "

게임…도 중요하지. 이 다음에 도시의 한복판에서 서바이벌 게임을 할 때 지기만 하면 안되고말고. 혹시 아니? 그때 노고단의 원추리와 명선봉의 구상나무가 든든한 에너지가 되어 줄지. 네 자신이 콘크리트 숲에 에너지를 채워 넣는 야생화나 원시림이 될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아빠는.

배두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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