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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김영박 '절골-지리산 시편' 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누군가 마을을 떠나며

미처 챙기지 못한 길이

꾸불꾸불

가슴 속으로 기어 들어온다

옛 시간 속에 머물고 있는 집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별이 저녁 내내 놀다간 폐가에서

하얗게 몸을 풀던 해가

돌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풀뿌리가 꼼지락거리는 것을

잠시도 쉬지 않고 바라본다

빈대가 들끓던 절이

혼자 먼 길을 떠나버린 마을

- 김영박(46) '절골-지리산 시편(詩篇)' 중

백두대간 어느 산봉우리, 어느 골짜긴들 동족상잔의 핏자국이 묻어나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지리산은 유난히 생채기를 많이 안고 산다.

김영박은 몇해째 지리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시편' 을 써오고 있거니와 이 시는 '절골' 에 들어가서 아픈 역사를 넘어 새 길을 찾는 선승(禪僧)의 눈빛인 듯 빈 자리를 보고 있다.

산은 깊고 길은 많구나.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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