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 "신고합니다, 경찰 장지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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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名士)에서 백수(白手)까지.

▶ 장지원 선수가 1일 여경 모자를 쓰고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모자는 서울경찰청에서 빌렸다. 변선구 기자

아테네 올림픽 성화가 꺼진 지 한달. 그 열광에서 돌아온 태극전사 340명의 요즈음은 어떨까. 똑같이 땀을 흘렸지만 처지가 제각각이다. 늘 그랬듯 성적은 성적인가 보다. 메달 색깔에 명암이 갈리고, 팔자도 달라졌다.

태권 처녀 장지원은 곧 경찰관이 될 참이다. 경찰대가 금메달을 따온 그에게 태권도 교관직 특채를 제의했다. 소속 팀인 삼성 에스원의 김세혁 감독이 나서서 계급과 대우 문제를 조율 중이다. 얘기가 잘 되면 오는 겨울이나 내년 봄 제복을 입은 장지원을 보게 된다. "제 꿈이 경호원이나 교사예요. 그 둘을 합쳐 놓은 듯한 경찰은 더 매력적일 것 같아요."

장지원뿐 아니다. 스타가 된 선수들은 정말 바쁘다. 방송 출연 및 온갖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지금도 계속된다.

만리장성을 무너뜨린 탁구의 유승민은 얼마 전 휴대전화 번호를 바꿨다. "감당 못할 정도예요. 방송 출연 요청만도 하루 10통이 넘어요. 특히 아는 사람을 통하는 경우가 많아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요."

태권도 문대성은 그래서 휴대전화를 매형에게 맡겼다. 그래도 기어이 줄을 대서 찾아온다고 했다. 한판승의 사나이 이원희는 소속 팀(마사회)의 일본 전지훈련(19~30일) 덕분에 그나마 집중 화살을 피했다. 대신 어머니 이상옥씨가 스타가 됐다. 벌써 TV에 네댓번 출연한 유명인사다. 뜨거운 인기는 머쓱한 '공짜 혜택'으로 연결된다. 식당이건 어디건 가는 곳마다 대부분 "그냥 가시라"고 한다.

"구두.옷.영화표가 자꾸 날아와요. '보약 지어줄게''여드름 치료해주마''영어회화 가르쳐 준다'는 제안도 몰리고요. 어떡해야 하나요?"(유승민). "'요즘 못 벌어서 어렵다'면서도 '장한 선수가 내 차에 타 영광'이라며 1만원 넘는 택시비를 안 받은 기사분껜 정말 미안했어요."(레슬링 정지현). 장지원은 동네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었는데 주인이 끝내 돈을 안 받았다고 했다.

이들을 포함해 대부분은 운동을 재개했다. 당장 전국체전(10월 8~14일)이 있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어도 내가 운동선수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요."(역도 은메달 장미란)

"메달 따고 은퇴하려 했는데 수정했어요. 플레잉코치로 2006년 아시안게임까지 뛰겠어요."(레슬링 노메달 김인섭)

덴마크와의 결승 사투로 인기가 폭발한 여자핸드볼팀도 그렇다. 은퇴를 생각했던 아줌마 선수들이 상당수 마음을 돌렸다. 일본 히로시마 메이플레즈 소속의 임오경.오성옥도 그렇고, 골키퍼 오영란도 신생팀 효명건설에서 최소한 내년까지 선수생활을 할 생각.

반면 실패의 그림자는 씁쓸하다. 첫 금메달을 기대했지만 노메달에 그친 공기소총 선수들의 충격은 특히 커 보인다. 올림픽 직후 육참총장기에서마저 예선 탈락한 천민호(경북체고)는 전국체전을 겨냥해 다시 총을 잡았지만 여전히 허전하다. 서선화.조은영도 도무지 기쁜 일이 없다고 말한다. 세 사람 모두 최근 대표팀에서 탈락했다.

썩 좋지 않은 성적을 낸 여자배구는 주축들이 은퇴를 선택했다. 남북한 공동 입장 때 남쪽 기수를 한 구민정과 장소연.강혜미다. 공격수인 구민정과 장소연은 다리, 세터 강혜미는 어깨 부상을 무릅쓰고 출전했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치료와 함께 새 길을 찾을 시간을 갖게 됐다.

스포츠부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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