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한국전쟁 60돌과 한국사회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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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적벽대전 등 『삼국지』전투에는 해박하지만, 막상 한국전쟁의 디테일에 무신경한 이들이 적지 않다. 개전 초기 춘천 방어전투만도 그렇다. 당시 이곳의 국군 6사단은 인민군을 7일간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그 통에 서부전선을 뚫고 내려왔던 북한군 3사단 병력을 서울에서 묶어둘 수 있었다. 춘천을 쉽게 내줬다고 가정해보라. 한강 이남 방어선 구축이 그만큼 어려웠고, 이후 전쟁양상도 바뀌었으리라. 인민군이 멈칫거리자 미군 개입에 겁먹은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진격인가, 중단인가?”(7월1일 전문)를 다그쳐 물어야 했다.

한국전쟁은 올해로 60년인데, 이 전쟁은 간단치 않았다. 정확하게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중앙일보 4일자 10면)이다. 전투 하나하나와 전개양상에 세계 지도자들이 긴장했다. 양측의 땀을 쥐게 만든 게 그 해 8, 9월 다부동전투다. 전략적 중요성으로는 도솔산전투(1951년 6월), 백마고지전투(52년 10월)에 훨씬 앞선다. 왜관·대구의 관문 다부동을 내줄 경우 당시 국토의 8%(낙동강 이남)만을 가졌던 한국정부는 바로 제주도로 밀렸으리라. 이 전투의 영웅이 요즘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하는 백선엽 장군이다.

연재 초반이라 중공군 개입의 서전인 운산전투가 소개되지만, 백 장군은 전쟁 내내 불굴의 1사단을 이끈 명장(名將)이다. 그는 지난해 펴낸 전쟁회고록 『군과 나』(재출간본)에서 “1사단의 최대 전투는 다부동에서 시작돼 다부동에서 끝을 맺는다”(96쪽)고 밝혔을 정도인데, 그게 어느 정도였을까? “인민군의 정예”라며 김일성이 자랑하던 3사단을 비롯한 적 3개 사단을 1개월여 전투에서 궤멸 내지 와해시켰다. 그게 전사(戰史)의 정설이다. 다부동전투에서 시간을 벌었기 때문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도 가능했다.

1사단은 미군에 앞서 평양에 입성했던 선봉부대로도 유명하다. 평양 진격이야말로 “어떠한 전쟁영화도 흉내 낼 수 없는 일대 장관”(123쪽)이라고 백 장군은 훗날 감격적으로 술회했다. 거기에는 곡절이 있었다. 1사단은 개전 초기에는 적의 탱크에 밀려 1개월 이상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했고, 그의 표현대로 ‘유랑(流浪) 사단’의 신세였다. 그 점에서 다부동전투는 최악의 조건을 딛고 이룬 명 전투이고, 가히 임란 당시의 명량대첩에 비견될 만하다.

실제로 백선엽은 지난해 설문조사에서 이순신·강감찬과 함께 역사 속의 전쟁영웅으로 꼽혔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에 대한 예우는 미국이 더 극진하다. 포트 베닝 육군보병학교는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인 그의 육성녹음을 들려주는 전시관을 지난해 마련했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도 이·취임사를 “존경하는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님!”으로 시작하는 게 오랜 관례다.

그러면 한국사회는 자기의 영웅에 왜 무심할까? 한국전쟁에도 심드렁하거나 남침·북침을 헷갈릴까? 가히 연구대상이다. 사람들은 한국전쟁은 먼 얘기이고, 국가안보쯤이야 독재시대의 구호라고 치부한다. 백선엽에는 무신경하면서도 미 남북전쟁의 로버트 리 장군은 멋지다고 본다. 이런 인식의 혼란이 없다. 한국사회 전체가 ‘평화의 덫’ ‘문약(文弱)의 덫’에 걸린 모양새다. 한국전쟁 60년 음미가 의미 있으려면 이런 사회병리까지 치유해야 옳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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