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재정부 차관, 금통위 회의 참석…“정부와 공조 필요” vs “한은 독립성 훼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늘 비워 두던 자리였다. 가면 안 되는 것도, 오지 말라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 체면 봐서 비워뒀을 뿐이다. 워낙 오랫동안 그러다 보니 새삼 간다는 게 뉴스가 됐다. 정부가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해 의견을 개진하겠다는 것 말이다.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는 앞으로 금통위 회의에 정례적으로 참석할 계획이라고 7일 밝혔다. 참석자는 재정부 차관과 금융위 부위원장이다. 두 사람은 금통위에 나가 정부 측 의견을 표명하게 된다. ‘열석 발언권’이므로 금통위원들과 함께 앉아 회의하면서 의견을 밝히되, 금리정책을 결정하는 의결권은 행사하지 못한다. 이에 따라 우선 8일의 금통위엔 허경욱 재정부 1차관이 참석한다.

윤종원 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이날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이를 관행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예외적인 경우에만 금통위에 참석했다”며 “그러나 경제위기를 계기로 정부와 중앙은행의 공조가 강조돼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앞으로 금통위 회의에서 경기, 물가, 금융시장 동향 등에 대한 정부의 입장과 정책방향에 대해 설명할 방침이다. 또 금통위에서 제기되는 의견을 재정·금융 등 정책운용에 반영할 계획이다. 일본의 경우 재무성 부대신과 내각부 심의관이 일본은행 정책위원회에 참석한다. 영국에서도 차관급인 재무부 거시재정정책관이 통화정책위원회에 참석하고 있다.  
한국은행법 제91조엔 ‘재정부 차관 또는 금융위 부위원장은 금통위 회의에 열석해 발언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 재정부 차관이 금통위에 참석한 사례는 1998년 한은법 개정으로 열석발언권이 생겨난 이후 98~99년 딱 네 번뿐이었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아 사실상 사문화되다시피한 카드를 정부가 다시 꺼내든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열석발언권에 강한 집착을 보여왔다. 2008년엔 정부가 내수 침체를 이유로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는 가운데 최중경 당시 재정부 1차관이 금통위에 참석하겠다고 했다가 물러선 적이 있다.

정부로선 법에 보장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지만, 논란과 우려도 크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자칫하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돼 통화정책의 비효율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준금리 인상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퍼져 있는 미묘한 타이밍도 파장을 키우고 있다. 시장에선 8일 금통위에서 강력한 금리 인상 신호가 나올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허 차관은 기준금리 인상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분명히 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은은 반발 섞인 우려를 보이고 있다. 특히 허 차관이 의견 표명 후 퇴장하지 않고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표결까지 지켜볼 경우가 문제다. 정부의 시선을 의식한 금통위원들이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익명을 원한 한은 관계자는 “참석을 반대할 명분은 없지만 최종 표결은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재정부 관계자는 “허 차관이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에는 상당한 파장이 일고 있다. 이날 채권시장 금리는 일제히 하락했다. 오전만 해도 전날과 비슷한 수준의 금리를 보였으나 정부의 금통위 참석이 발표되면서 하락 폭이 커졌다. 국고채 3년물은 전날보다 0.11%포인트 하락한 4.32%에 장을 마감했다. 시장은 정부가 금통위 결정에 적잖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본 셈이다. 이제는 한은 스스로 독립성을 지켜낼 만한 힘이 있는지, 또 정부가 이를 존중할 의사가 있는지, 두 기관이 시장에 입증해 보이는 일만 남았다.

이상렬·김원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