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중독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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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현대 사회는 바야흐로 심각한 중독상태에 빠져 들고 있다. 술.마약만이 아니다. 온갖 약물.담배.도박.경마.쇼핑.게임, 스토킹으로 통하는 사랑 중독, 섹스.증권 등 최근의 컴퓨터 중독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저만치 파멸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 줄 번연히 알면서 그 위험의 낭떠러지를 향해 즐겁게 달리고 있다. 건전한 취미나 스포츠도 도를 넘으면 문제다. 낚시 과부, 바둑 과부니 하는 말이 생긴 지도 한참 됐다. 친목으로 하는 고스톱도 밤을 새우는 정도라면 가정에, 직장에 지장이 없을 리 없다. 골프.테니스도 도를 넘으면 직장일은 뒷전, 온통 공에 미쳐버린다. 거기다 내기가 겹치면 도박중독까지 이중 중독이 돼 더욱 어렵게 된다.

물론 이건 우리만의, 그리고 남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특히 한국 중년 남자의 중독 증상은 위험수위다. 술은 이미 세계적이란 게 증명됐다.

일확천금.조급성.의존성.나약.과도한 경쟁.스트레스.현실 도피.퇴폐.문화의식의 결여.병적인 만족감 부족…. 이런 게 중독을 만드는 심리.사회적 요인이다. 한국 중년은 골고루 갖추었다.

거기다 좀 살게 됐다고 짜릿한 자극, 새로운 재미를 찾는 경향이 증폭되면서 중독 현상은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엔 가련하고 착한 여인의 헌신적 봉사가 배경이 되고 있다. 일번 타자가 엄마다.

어릴 적부터 헌신적으로 잘 해준다. 모든 건 엄마가 미리 알아서 다 해주니 언제나 자기 중심이다. 참고 기다릴 줄 아는 훈련은 시킨 적도 없다. 고생이 뭔지도 모른다. 남에 대한 배려가 있을 턱이 없다. 자기만 좋으면 그뿐 제 멋대로다. 인간관계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점점 엄마에게 의존적으로 된다.

짚이는 데가 있습니까? 중독에 잘 빠질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엄마가 만들어준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런 젊은이가 여자에게 인기가 있다. 부드럽다는 것만으로도 요즈음 여자들 혼을 뺀다.기분파다. 놀기도 잘 하고 돈도 잘 쓴다. 화려하고 시원시원, 걱정도 없고 언제나 밝고 명랑하다.

여기에 반한다. 빛 좋은 개살구를 감별못해 깜빡 속아 넘어간다. 이렇게 해 중독 예비생의 세계에 제2의 여인, 아내가 등장한다. 그의 중독 증상이 어느 정도 틀이 잡히고 본격화하면 이 가련한 두 여인이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핀다.

불행히 그 보살핌이 점점 그를 중독의 늪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모른 채. 30대 초반에 이미 취미생활에 빠져 가정.직장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면 요경계 인물이다. 그게 친구들끼리 재미로 하는 고스톱이건, 술이건, 바둑이건, 그런 성향이 강한 남자라는 판단이 서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우선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 세상 어떤 환자도 자신의 중독에 관한 한 정직하지 않다. 부인하거나 과소 평가한다. 괜찮다고 주위 사람을 설득한다. 여기에 넘어가면 안된다.

재산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게 재산분할 등 법적인 조치를 해둬야 한다. 다른 가족만이라도 살아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가 취업 준비를 해야 한다. 남편 믿다간 당장 아이들 밥 굶길 일이 생긴다. 이건 시간 문제다. 어렵긴 하지만 남편 빚을 갚아주면 안된다. 처음부터 단호해야 한다. 이번만! 하다 끌려들어 가다간 살림 거덜나고 사람까지 폐인으로 만든다.최악의 경우 경찰 문제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저지른 이상 그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애정을 갖되 냉철해야 한다. 이들은 가족, 특히 엄마와 아내의 심리적 약점을 이용해 자기편으로 만드는 특수한 재능이 있다. 때론 협박.읍소.동정작전 등 가능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

어떻게 나오든 동정심이나 보호본능의 발동은 금물이다. 전문가와 조기에 상담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가족의 믿음이나 애정만으로는 안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독은 큰 병이다.

과학적인 대처가 필요한 중증환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이번만은' 하는 태도는 안된다. 이번이 몇 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점점 증상은 깊어가고 치료는 더욱 어렵게 된다. 우리 사회 중독증상은 심각하다. 모두가 경계할 일이다.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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