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리더들 희망은 불황보다 강하다] 4. '터보테크' 장흥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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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성공한 사람은 자립심이 강하게 마련이다. 어차피 기댈 곳 없는 처지라면 더욱 그렇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고독한 자신과의 대결부터 치러야 한다. 휴맥스의 변대규 사장, 안철수연구소의 안철수 사장 등과 함께 벤처 1세대로 불리는 장흥순(44.사진) 터보테크 사장이 바로 그런 경우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자취생활을 시작했으니, 적어도 독립심 하나만은 대단한 사람이다.

#자립심이 큰 도전 키웠다

"큰물에서 꿈을 키워라."

충북 괴산의 시골 소년 장흥순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권유에 깜짝 놀랐다. 갓 열살을 넘겼을 뿐인데, 어머니의 당부는 그에게 황당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교육도시 청주에서 자취하며 초.중.고를 마쳤다.

잘나가는 벤처회사 사장이자 4년째 맡고 있는 벤처기업협회장, 코스닥위원회 위원 등 장흥순의 대외활동은 활발하다. 이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를 외향적인 사람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지독한 외로움을 겪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더욱 싫어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한 자취생활이 그를 체질적으로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없어지더군요. 결과도 스스로 감내하는 습관이 생기고요."

이렇게 터득한 체질은 그가 자금을 조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과 박사과정 시절인 1988년 4월 장흥순은 회사 설립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주변에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 찾아간 곳이 한 은행 지점. 가난한 시골 출신 학생이니 돈이나 담보가 있을 리 만무했다. 무작정 지점장에게 통사정했다.

"KAIST 박사 한명 만드는 데 얼마나 드는지 아십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따져 1억5000만원입니다. 저희 회사의 박사 두명을 담보로 3억원 좀 빌려 주십시오."

박사 한명을 양성하는 데 그만큼 돈이 드는지는 장흥순 자신도 몰랐다. 3억원이 필요해 임시변통으로 둘러댔을 뿐이다. 박사학위를 담보로 하다니…. 지점장은 기가 찼지만, 장흥순의 끈질긴 설득과 기술력을 높이 사 돈을 내주었다.

#위기에서 더 많은 기회가 보인다

그때 장흥순은 국산 컴퓨터 수치제어(CNC) 제조기술을 갖고 있었다. CNC는 컴퓨터를 이용해 정밀기계 부품을 깎는 장비로, 당시엔 일본 기술만 판칠 때였다. 장흥순이 '기술 독립군'을 외치며 국산화에 성공한 CNC 기술은 공작기계 선진국인 일본보다 겨우 1년 늦었다. 그만큼 제품발표회에서 호평을 받았다. 91년 일본으로 역수출하는 기회도 잡았다. 신생 벤처회사가 첨단기계 선진국에 역수출한다는 자부심은 대단했다. 드디어 200대의 수출품이 일본으로 향하는데…. 아직 기술이 서툴러 제품 모두가 불량품인 줄도 모르고 장흥순을 비롯해 터보테크 직원들은 모두 우쭐했다. 더 큰 문제는 일본 바이어가 납품받은 제품을 포장도 풀지 않은 채 미국으로 수출한 것이었다. 당연히 미국시장에서 엄청난 항의가 쏟아졌다. 장흥순은 "돈을 벌기는커녕 회사가 문을 닫을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였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그는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제품수리에 나섰다. 그때 쓴 돈이 제품 값의 몇배가 넘었고, 자본금을 훨씬 웃돌았다. 그 때문에 주위의 반대가 많았지만 완벽한 애프터서비스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 결정은 성공했다. 회사의 신용이 크게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특히 기아사태로 기계설비업체가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불필요한 인원을 줄이고 서울 본사를 폐쇄, 청원공장으로 쫓겨가다시피 내려갔다. 그 해 종무식 때 모든 직원이 눈물을 흘렸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숱한 고비를 넘겼지만 이상하게도 위기에 처하면 더 많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위기에 직면할수록 문제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되죠. 그걸 깨달으면 다음에 나가야 할 방향과 아이디어가 보였습니다."

그는 "성공에서 중요한 것은 '나도 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하지 말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정선구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 장흥순은

1960년생.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대학시절엔 연극반 활동에 몰두했다. 정진수 성균관대 교수, 문성근.정한용씨 등이 서강대 연극반 출신이다. 터보테크의 매출액은 97년 172억원에서 지난해 638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순익은 지난해 11억원으로 매출에 비해 적은 편. 앞으로 방위산업과 나노기술을 결합한 정보기술(IT) 분야에 도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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