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이홍구 칼럼

통치는 곧 우선순위의 선택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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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 100년 우리가 겪어온 역사적 난국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나라의 존립 자체가 흔들렸던 국가 생존의 위기이다.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에서 전무후무하게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던 1910년 경술국치,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2년도 안 된 시점에서 김일성과 스탈린의 합작에 의한 기습으로 풍전등화처럼 백척간두에 몰렸던 1950년 6·25전쟁은 정녕 국가 존립의 위기였다. 둘째는 국가의 발전방향과 전략을 선택하는 기로에서 극심한 국민적 분열과 저항에 직면했던 공동체 파탄의 위기이다. 민주화의 횃불을 지켜낸 1960년 4·19의 함성과 1980년 5·18의 광주항쟁은 바로 그러한 위기극복의 노력이었다. 국가 존립의 위기이든 공동체 파탄의 위기이든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나라의 운명이 깊은 수렁에 빠졌던 것은 그 당시의 정치체제나 지도자들이 국가가 당면한 과제들의 우선순위를 적절히 선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최우선 과제가 무엇인지조차 판단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는 결론을 역사의 교훈으로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강대국의 흥망』 등 세계사 속에서 강대국들의 부침을 엮어온 역사학자 폴 케네디 교수가 강조하고 있는 ‘국가적 과제의 우선순위 선택의 중요성’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는 아무리 나라의 힘과 부가 크다고 할지라도 모든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할 수는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망각한다면 결국은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로마로부터 미국에 이르는 사례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케네디 교수의 우려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정책이 바로 그러한 우(愚)를 범하고 있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한정된 자산과 능력을 감안할 때 당면하는 과제의 우선순위를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 국가의 명운이 좌우될 수 있다는 일반원칙은 우리의 경우에도 물론 적용되는 것이다. 다만 국가과제의 우선순위의 적절한 선택은 그 결정이 수반하는 대가(代價) 또는 경비에 대한 치밀한 계산과 이를 책임지고 지불하겠다는 국민적 합의, 그리고 지도자의 결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대가를 치르지 않는 소득이나 성공은 있을 수 없음을 항시 명심해야 한다.

일제치하 35년에 분단 65년을 더하면 우리 민족은 지난 100년, 즉 한 세기 동안 통일된 독립국가를 갖지 못한 기구한 경험에 묶여 있었다. 과연 우리는 민족 통일이란 과제에 어떠한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어떤 정도의 희생을 치를 국민적 합의가 되어 있는지, 또 분단 상황에서의 민족공동체 관리와 급변사태 대처에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 가늠해 보아야 한다.

애초에 우리가 국권을 상실한 가장 큰 원인은 제국주의 시대가 몰고 온 국제정세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수반하는 세력균형의 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속수무책의 고립이었다고 판단한다면 이제는 마땅히 폐쇄적인 내셔널리즘에서 탈피하고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 걸음 앞서 국제주의의 기치를 들고 지구촌 공동체 건설에 앞장서 나아가야 하는데 과연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감당할 국민적 합의는 조성되어 있는가.

무엇보다도 어렵사리 성취한 우리의 민주공동체를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의 분열과 파편화의 위험으로부터 지켜내고 헌법이 살아 숨쉬는 타협의 정치를 통해 공동체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도록 획기적 정치개혁을 높은 우선순위로 밀고 갈 국민적 저력이 발동할 수 있는가. ‘통치는 곧 선택’이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진리를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되새기면서 새해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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