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한학자 이창섭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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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마음에 음사(淫邪)를 생각하지 않고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는다… 사실로 졌지만 마음으로 안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지조가 남산골 샌님 '딸깍발이' 의 신조였다. " (이희승 수필집 '벙어리 냉가슴' 중)

16일 75세를 일기로 별세한 한학자 이창섭(李昌燮)씨는 바로 이런 '딸깍발이' 의 삶을 산 선비였다.

정규교육이라곤 경북고를 마친 게 전부지만 글읽기를 업으로 한 고인의 학문적 깊이는 유(儒).불(佛).선(仙)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그는 조선시대 성리대전으로 꼽히는 이만부(李萬敷)의 '도동편(道東編)' '지행록(地行錄)' 등을 국내 최초로 번역해 소개했다.

천태종 종전(宗典)인 천태삼대부 60권을 비롯, 수많은 불교서적과 '참동계(參同契)' '입약경(入藥經)' 등 도교 서적까지 해독해 낸 것도 그였다.

천태종 종회의장 덕산(德山)스님은 "어려운 한자의 행서와 초서체까지 척척 해독해 낸 고인은 제도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한학의 대가였다" 며 "선현들의 학문의 맥을 그가 되살려 놨다" 고 말했다.

흡사 남산골 샌님 '허생' 의 현신(現身)인 듯, 고인은 사회와는 담을 쌓은채 오직 독서에만 몰두했다. 교수 제의도, 도산서원 원장 자리도 모두 고사했다.

하지만 이런 청빈한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런 대가를 수반했다.

살림은 늘 아내와 자식들의 몫이었다. 궁핍속에 아들 두 명이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등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남은 5남매는 자연스레 고인에 대해 '존경' 과 함께 '원망' 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주린 배를 안고 청계천에서 짐자전거를 나르면서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던 셋째 아들 이성(李星)씨의 응어리가 가장 컸다고 한다.

큰 딸 경림(시인)씨는 "아버지는 무모할 정도로 아집이 강해 가족이 굶어도 원하지 않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며 "하지만 아버지는 평소 '때묻지 않은 선비' 인 점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고 회고했다.

고인은 큰 아들이 세상을 떠난 1988년에야 비로소 고전을 한글로 옮기는 일을 시작하며 은둔에서 벗어났다.

일생 처음 타협을 시도하며 자식들에게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고인은 이순(耳順)이 넘은 나이에 고전 번역을 시작했지만 한달에 2천여매씩 작업을 계속하며 10여년만에 무려 2백60여권을 번역해 냈다.

한.중 수교 즈음에는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의 중국어 친서를 대신 작성하기도 했다. 당시 이 편지를 받은 덩샤오핑(鄧小平)이 "한국에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느냐" 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아버지에 대해 응어리를 지녔던 5남매도 점차 아버지의 삶과 노력을 이해하게 됐다.

특히 서울시 시정개혁단장으로 성장한 이성씨는 지난해 8월 글읽는게 업이었던 부친때문에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화해를 잔잔히 묘사한 '아버지' 라는 수필을 월간 문학세상에 응모,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이제는 저도 악수를 청하고 싶습니다" 라며 닫힌 마음을 활짝 열었으나 아버지의 빈소에는 올 수 없었다.

"흑백논리로 무장해 가는 아이들에게 여유를 갖게 해주고 싶다" 며 중학생, 초등학생인 세 아들을 1년간 휴학시키고 서울시 시정개혁단장 자리도 미련없이 내놓은 채 지난 11일 훌쩍 세계일주에 나섰기 때문이다.

대신 빈소에는 유림과 스님들에서부터 문인, 서울시 공직자들이 우리시대 '마지막 선비' 의 가는 길을 애도했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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