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체두관(剃頭官)이 가위를 들고 상투를 자르는 모습(『을사늑약 100년, 풀어야 할 매듭』·독립기념관). 단발령은 명성황후 시해로 흉흉해진 민심을 자극해 을미의병이 터지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1896년 1월 17일 이필희 의병을 필두로 일어난 을미의병은 왕후 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령 주동자에 대한 응징의 봉화를 높이 들었다. 그러나 그해 2월 11일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였기에 일본은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단발을 하도록 한 것은 그들의 모자판매상과 의류상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다.”(『윤치호일기』 1895년 12월 26일자). “단발령의 시행으로 일시에 번창하게 된 것은 일본인 이발소와 양복점, 구두와 모자 등 양복의 부속품 판매점이다. 검은 모자, 벨트, 셔츠, 소매장식, 멜빵, 궐련, 시계 등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호치(報知)신문’ 1896년 2월 2일자). 그때 일본은 새로운 시장 창출과 조선 상권을 장악하려는 경제적 야욕을 채우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제 나라가 병들어 시든 것을 구하려 하는 마당에 어찌 한 줌 머리카락을 그리도 아끼십니까? 국왕이 단발의 조칙을 내렸음을 알리고 먼저 머리를 깎아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왕명이라 해도 따를 것이 있고 따르지 못할 것이 있는 법이외다. 의에는 언제나 옳고 그른 것이 있는 법이니,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 도는 허물 수 없는 것이며, 머리는 벨 수 있어도 그 뜻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유림의 거두 최익현은 국왕의 머리를 직접 자른 유길준의 단발 권유에 답해 차라리 내 목을 치라고 답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단발령은 시대가 요구하는 순역사적 개혁이었다. 그러나 외세를 등에 업고 여론의 지지 없이 개혁을 추진한 이들보다 자신이 지키고자 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내놓길 주저하지 않은 이들의 올곧은 삶이 왠지 그리운 지금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