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읽기] TV가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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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몇 사람이 정성껏 굳은 땅을 판다. 그들이 찾는 건 묻힌 보물이다. 드디어 희끄무레한 게 눈에 들어온다. 놀랍게도 그건 인간의 뼈다.

누군가 "그냥 묻어두자" 고 한다. 우선 겁이 나고 더 파보았자 힘들고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기 때문이다.

누군가 반대의 의견을 보인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일 수도 있다. 세상에 알려 한을 풀어주자" 는 게 그의 주장이다.

TV는 오늘도 신명나게 파헤친다. 연예인의 연애도 파헤치고 에이즈 감염 경로도 파헤치고 사이비 교주의 비리도 파헤친다. 청문회를 통해 정치가나 법조인의 과거도 파헤친다.

'참 힘있는 매체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한편으론 현실의 힘에 따라 '기획' 된 그림에 딱딱 맞아떨어지는 걸 보며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힘이 좋긴 좋구나" 와 "힘을 좋은 데 써야 할텐데" 가 그것이다.

TV가 힘이 세다면 그 힘을 어디에 써야 할까. 한밤에 유부클럽의 중개도 맡고 때로는 연예통신의 송신사 역할도 필요하다. 그러나 잊혀진(잊고 싶은?), 혹은 힘있는 자들이 파묻은 부끄러운 진실도 파헤쳐야 한다.

TV는 기껏해야 소리와 그림의 결합이고 그 소리의 대부분은 말이다.

쏟아져 나오는 말의 홍수 속에는 귀담아 들어야 할 말도 있지만 차마 듣고싶지 않은 말, 들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횅한 말도 있다.

지난해 말에 중단했다가 올 6월 25일부터 다시 방송되고 있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를 보면 새삼 '말' 의 무게와 깊이를 실감하게 된다.

지난 일요일 자정쯤 방송된 '1994년 한반도의 전쟁위기' 를 보면서 묘한 감정의 변화를 겪은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경우 호기심으로 시작한 정서의 기류는 차츰 분노로 바뀌었고 그 분노는 다시 슬픔으로, 마침내는 부끄러움으로 가라앉았다.

방송이 끝난 후에 세 가지 기억이 뒤엉켰는데 그것들은 각각 한 권의 소설 제목과 한 편의 영화장면, 그리고 선인이 던져준 경구였다.

첫번째는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 이었고 두번째는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 였다. 주인공은 자비(mercy)를 구하면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한다.

그가 최후를 맞으며 세상에 던진 말의 울림이 지금도 얼얼하다. 그것은 자유(freedom)였다. 그가 외친 자유는 자존.자결의 실천이었다.

최후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 이 남았다. 그가 가르친 힘의 사상 중 결론에 해당하는 "우리가 믿고 바랄 것은 오직 우리의 힘밖에 없다" 는 내용이다.

바람에 쏠려 살다보면 힘있는 자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지금 텔레비전 뉴스를 보라. 격전지가 따로 없다. 온통 세상은 힘겨루기의 마당이다.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승자로 남고 누군가는 역사 앞에서 패자가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진실이 옷을 갈아입지는 않는다. 다만 편의나 눈앞의 이득을 위해 묻어버리거나 진실에 돌 던지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말의 진실성과 함께 그 말을 전해야 할 '때' 도 중요함을 프로그램은 시사한다.

우리는 종종 말해야 할 '때' 를 놓치기도 하고 부러 놓아버리기도 한다. 말할 수 있을 때 말하는 것보다는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게 TV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거나 강제로 시키는 것만 말하는 TV는 기회주의적 TV다.

역사는 굴러가기도 하고 흘러가기도 하지만 마침내는 안정된 곳에 머무른다. 그 지점이 진실의 언저리가 되도록 TV의 안과 밖이 두루 깨어있어야 한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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