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무명 방탄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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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나라 최초의 정전기 발생장치에 대한 기록으로는 19세기 초반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에 들어 있는 목격담이 꼽힌다.

강이중(姜彛中)이라는 서울 사람의 집에 뇌법기(雷法器)라는 유리공 모양의 물건이 있는데, 이것을 만지면 '소변이 마려운 듯한' 자극을 받는다고 이규경은 소개했다.

그러나 애석하지만 일본은 이보다 반세기 전에 발전기를 만들었고, 독일에서 서양 최초의 발전장치가 제작된 것은 일본보다 1세기나 앞선 때였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하자 그의 부친인 대원군도 '운현궁의 봄' 을 맞았다. 부국강병에의 의욕이 넘치던 대원군은 1865년부터 갖가지 신식무기 실험을 벌였다.

이 해 9월엔 수뢰포(水雷砲)를 만들어 한강에서 실험발사했고, 이듬해엔 최초의 서양식 기선도 만들었다.

그러나 석탄 대신 숯을 연료로 한 이 기선은 1분에 열발자국 거리밖에 움직이지 못해 곧 해체되고 말았다.

대원군은 무명천을 13겹으로 누빈 방탄복도 만들었고 뱃전에 깃털을 달아 쉽게 가라앉지 않게 고안한 '비선(飛船)' 도 실험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1860년대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은 30여년 전 이규경이 서양문물 알리기에 몰두하던 때보다 별로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만으로 조선의 서산낙일(西山落日) 운명을 역전시키기는 무리였다.

인류의 조상은 언제부턴가 돌이나 막대기를 들고 상대에게 그냥 접근하기보다는 멀리서 정확하고 강하게 던져 맞히는 것이 더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이것이 탄도학(ballistics)의 출발이다.

원격무기는 새총.활.투석기로 차츰 발전해 1420년께 견착(肩着)식 소총이 출현했다. 체코 지방의 농민부대가 이 근대식 소총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포도 나날이 발달해 현대의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이르렀다. 배경에 해당국의 과학기술 수준, 즉 국력이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대원군의 신무기 개발이 망해가는 나라의 애처로운 안간힘이었다면 요즘 미국이 열올리는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 실험에서는 세계 최강국의 '몸조심' 을 넘은 오만함이 물씬 풍긴다.

안팎으로 반대의 목소리가 드높고 3차 실험마저 실패로 끝났는데 구태여 계획을 강행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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