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삶의 향기 풍기는 거리벽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얼마 전 일곱 살 난 딸아이와 광주역 근처를 지나는데 딸아이가 "저것 좀 보세요. 아빠" 하고 탄성을 질렀다.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거대한 그림들이 수십 미터에 걸쳐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어둠침침하고 지저분하게 방치된 벽이었는데 나무와 새가 어우러진 시원한 거리 풍경화로 변해 있었다. 작지만 상쾌한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광주의 거리엔 얼마 전부터 즐거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운동장과 차도를 가르는 북동의 한 초등학교 벽에 울긋불긋 그림이 그려지더니, 삭막하기 그지없던 문흥동 고가도로 아래 벽에 숨통을 트여줄 것 같은 벽화가 그려졌다.

올 봄부터는 거리벽화를 그리는 풍경 그 자체가 눈길을 끌었다.북구에서 주관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손을 잡고 벽화를 그리는 모습은 여느 사생대회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벽화그리기에 참여한 아이들은 벽을 이제 더 이상 벽으로 느끼질 않는다고 한다. 벽은 새와 나무, 꽃, 풀, 거리, 사람, 장승을 그려 넣는 거대한 도화지로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첨병인 미국에선 오래전부터 사람이 만든 벽이 더 이상 '막힘' 의 공간이 되어선 안된다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 현재 2천점 이상이라는 미국 LA의 공공건물에 그려진 벽화. 그것은 1960년대 미국의 벽화운동으로부터 출발했다.

이후 미술의 예술적.대중적.정치적 목적에서 벽화를 그려오긴 했지만 벽화의 내용적 큰 틀은 인간을 향한 커뮤니티였다.

그렇다. 나는 이 커뮤니티 체계가 오늘 우리의 문제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아득한 그 먼 옛날 생산과 풍요를 간절히 바라며 그려놓았던 암각화, 팔만 가지도 넘는 인간의 번뇌를 벗어나고자 구원의 붓질을 해댔던 사찰의 벽화가 세월을 넘어 우리 곁에 있지 않는가.

나는 광주가 더 많이 그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나의 당대, 우리 당대의 문제와 미래를 새겨넣어야 한다고 본다.

문화라는 것은 세월 속에 비로소 영특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의 거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벽화만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공공 미술프로젝트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 내용도 참신한 시대적 흐름을 담을 수 있는 형태로 발전해 나간다면 '도시' 자체가 새로운 관광명소로도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김호균 <시인·광주 북구 문화의 집 상임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