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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당론을 배반하십시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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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젊다는 것은 치열함이다. 치열함이 없는 젊음이 젊음을 강조하면 우울하다. 정치권의 젊음으로 강조된 386이, 특히 여당의 386이 이상하다. 당내 민주주의를 일궈내겠다고, 당론과 소신이 다르면 소신을 펼 거라고 한껏 기대하게 해놓은 그들이 벌써부터 눈치만 치열해진 느낌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총리인준안 처리과정에서 당론을 배반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李총리에게 결정적 카드가 없다" "부족해도 국정현안에 끼칠 악영향 때문에"

몇달 사이에 결정적으로 말을 바꾼 이한동(李漢東)총리가 그 뻔한 잇속을 들키고 있었다면 참신함으로 부각됐던 그들은 몇달 사이에 조로(早老)한 느낌이다.

왜 그렇게 늙은 논리를 따라가야 했을까? 구태의 정치인이 젊은 피의 참신과 치열을 닮기를 기대했는데 젊은 피가 오히려 구태의 정치인을 닮고 있다.

종이 호랑이처럼 그들이 당내 민주주의의 견인차 역할을 못하니까 명분없는 세력의 명분없는 싸움이 계속된다.

총재는 국무총리, 총재권한대행은 국회부의장, 사무총장은 국회상임위원장…. 온갖 감투바람이 분 자민련을 향해 묻고 싶어진다.

선거에 패배한 정당 맞는가. 선거에서 지고도 바리바리 챙길 줄 아는 능력을 어디까지 믿는 건지. 이제는 법을 바꿔서라도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달라고 떼를 쓴다.

원내교섭단체는 혜택이 많다. 국회에 총재실과 원내총무실 등 넓은 방을 받으며 정책연구위원들을 둘 수 있다.

연간 수십억원의 자금도 제공된다. 모두 국민의 세금이지만 흥청망청해도 감시의 방법은 없는 너무나 편한 돈이었다.

총재 사모님 오찬 간담회도 그 돈으로 했다니까 할 말이 없다. 세금은 철저하게 걷어가면서 세금집행은 왜 그렇게 허술한지.

선거결과는 원내교섭단체가 될 수 없으니 이제 그 혜택을 포기하라고 했건만 자민련의 미련은 집요하다. 국회의장을 찾아가 직권상정을 해서도 법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법은 공평무사한 거라고, 정치의 시녀일 수는 없는 거라고 믿는다면 나올 수 없는 발상이다. 말이 좋아 직권상정이지 날치기를 하라는 협박이 아닌가? 그 협박속에는 직권상정만 되면 17석이 아쉬운 민주당도 당론이라는 이름의 강요로 통째로 끌려올 거라는 계산이 들어 있다.

민주당의 모든 의원을 거수기로 보는 그 발상에 민주당 의원들은 동지애를 느낄까, 모독감을 느낄까? 날치기는 하지 않겠다는 걸 공약으로 내세웠던 의장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 협박을 무서워할 만큼 만만한 의장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노선을 가지고는 치열해본 적이 없는 정당이 자리를 가지고 교묘하게 흥정하면서 자기 이익만 지나치게 밝히니까 알 것 같다.

이제 그만 하라고, 너희에게서는 희망을 볼 수 없다고 국민이 밀어낸 이유를. 그런데 국민이 직접 밀어낸 자민련의 떼가 통하는 이유는 뭘까?

바로 당론 때문이다. 이한동 총리에게 면죄부만 준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었다. 우리 정치의 최대 걸림돌이 당론인 것은 아닐까고. 이한동 총리는 모든 죄를 당론으로 넘겼다.

날치기 통과도 당론이었고, 독재옹호도 당론이었고, 민주화 투쟁을 비판한 것도 당론이었고, 그리고! 그렇게 말을 바꾼 것도 당론이었다.

도대체 당론의 정체는 뭘까? 절차가 민주적이지 않은 우리 정당사에서는 해바라기들의 비호를 받은 총재의 야심이 당론 아니었나.

그렇구나, 그리고 보니 소신은 없고 당론만 남은 그 사람을,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적격자라고 지명된 그 사람을 총리 시켜준 것도 또다른 '당론' 이었다.

면죄부만 준 부실한 청문회와, 그 청문회의 결과도 반영되지 않은 표결 결과를 보면서 당론이 나라를 망친다고 생각했다.

당론만 있고 국민은 안중에 없는 저 정치 행태가 언제까지 갈까. 정치인이 당론에 따라 처신의 논리를 바꾸는 한 우리 정치엔 희망이 없다.

국회의원이 거수기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사람 한사람이 헌법기관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자존심 있는 정치인들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총재의 야심이 당론으로 비호되는 그 이상한 정치가 종식된다. 그래야 진짜 당론을 수렴하는 과정이 생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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