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차례] "이 땅의 아내들이여, 미안하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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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함께 운명처럼 겪게 되는 여성들의 '명절 증후군'. 시장 보랴, 음식 장만하랴, 손님 접대하랴…. 명절을 앞둔 주부들의 머리는 벌써부터 지끈지끈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들은 기꺼이 그 '여성의 짐'을 받아들였습니다. 오직 가족을 위해.

결혼이란 여성에게 있어 '꾀꼬리를 죽여 가죽을 만드는 짓'이라는 경구가 있다. 명절이나 제사가 돌아오면 더욱 그렇다. 여성은 꾀꼬리처럼 살아 있는 한 목숨 값의 고유한 '꾀꼬리 울음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묵묵히 준비하고 일하고 치워야 한다. 남자들끼리 모여 텔레비전 보고 고스톱 치고 윷놀이할 때조차 짬짬이 간식을 내가야 하고 술과 안주를 대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자들이야 뭐 생밤 하나 쩍지게 치면 끝인데, 그것까지 물에 담근 생밤과 칼을 고스톱 자리에까지 갖다 드려야 고스톱 패 안 좋아 광 팔 때 겨우 생색 내며 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요즘이 어느 세상인가. 바야흐로 욱일승천, 시대의 대안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여성의 세상'이다. 남자들이 누리던 전근대적 권위와 영향력은 이제 거의 바닥에 이르고 있다. 공직에 있거나 한 남자들은, 예전에 체제나 보안법이나 군부에 대해 발언할 때처럼 지금은 여성문제에 대해 발언할 때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잘못했다간 무쇠 두멍 쓰고 늪에 빠지는 신세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성이 '쎄'졌을 뿐 아니라 여성 지위 향상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다 할 것이다. 전근대적 남성들의 마지막 보루인 호주제마저 풍전등화 신세가 아닌가.

그런데 참 별일이다.

명절을 맞아 온 집안 식구들이 모이면 뭐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현관문 들어서면서부터 여자는 부엌으로, 남자는 안방이나 거실의 고스톱판으로 '앞으로 갓'한다. 여기엔 잘난 여자, 못난 여자, 배운 여자, 못 배운 여자가 따로 없다. 사회에서 호주제 폐지 운동에 앞장서는 '쎈 여자'들도 대부분 그렇다. 사회에선 '꾀꼬리'처럼 청명하게 울지만, 명절 때는 너나 없이, 대부분 '꾀꼬리 가죽'의 신세로 되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이상하지 않은가. 1990년대 이후 우리가 받아들였던 '페미니즘의 폭발'은 어디로 가고, 호주제도 타파할 수 있을 만큼 변화한 '평등의식'은 또 어디로 보냈는가. 특히 오십대, 육십대, 어느덧 어머니로 살아가고 있는 '아줌마'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남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언필칭 신세대라고 불리는 '새깽이'들조차 어머니와 아내를 겸하고 있는 '아줌마'들만 바라보고 있으니 명절이 끝날 때까지 여성들은 아예 죽었다고 복창하고 노새처럼 부엌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 한다. 아들과 남편은 말할 것도 없고, '싸가지'없는 일부 신세대 며느리와 딸까지 페미니즘의 폭발로 거둔 여성주의 승리를 자기 몫으로 삼는 데 급급해 어머니에게까지 나누려 하지 않는다. 위로는 층층시하 아직도 집안의 고스톱 패를 쥐고 있는 남자 어른들이 있고, 아래로는 여성주의 승리를 제 과실로만 따먹으려 하는 '싸가지' 없는 '새깽이'들이 있으니, 중년의 여성들은 돌 틈에 끼인 약탕관 신세라, 안팎곱사등이로 부엌 귀신이 될 수밖에 없다. 뼈마디는 결리고 머리통은 터질 것처럼 끓어올라도 참아야 한다. 더 웃기는 것은 평소 둘이 살 땐 부엌일도 곧잘 나누어 하던 착하고 젊은 남편들조차 온 가족이 모이면 모든 걸 나 몰라라 한다는 사실이다. 오랜 전통과 관습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암묵적으로 '그들'은 재빨리 집단화하기 때문에 '후환'도 잊고,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고스톱판에 껴 앉아서 '이봐, 물 가져와'어쩌고 하는 것이다.

폐일언하고.

명절이 되면 우리 사회가 아직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족구조 안에서 오히려 명백히 보여준다. 호주제 폐지까지 도달한 여성주의 승리는 아직 삶의 지표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성취해야 할 것은 제도만이 아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파스'와 '두통약'에 의존해 만든 음식들을 앉아서 받아먹을 때 당신들은 행복한가.

박범신<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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