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바람따라] 경기도 광주 '장승 나들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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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성난 듯하지만 우습고, 위엄 있어 뵈려 하지만 친근한 모습. 험상궂은 얼굴을 만들려 했지만 만든 사람의 심성을 벗어나지 못해 동네 할아버지.할머니를 닮았다.

민간신앙의 상징물이자 민족 심성의 조형물이었던 장승. 이제는 신앙성이 옅어지면서 점차 소멸해가고 있다.

그런데 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경기도 광주군 일대, 43번 국도에서 멀지 않은 9개 마을 11곳에는 장승 전승이 살아 있다.

1988년 조사 때 전국의 장승 유적이 1백69곳(석장승 79, 목장승 90) 정도였던 데 비하면 대단히 많은 것이다. 이 일대 장승 유적의 기본형은 2년마다 음력 2월 초에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 나무장승과 새를 만들어 장대 위에 앉힌 솟대를 함께 세우는 것이다. 나무는 썩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다시 세운다.

약간 다른 것도 있다. 무사를 닮은 무갑리 장승 이름은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이다.

우산리 장승은 2년마다 새로 세우기가 어려워져 98년에 잘 썩지 않는 관솔로 내구형 장승을 만들면서 솟대를 세우지 않았다. 목현리는 단오날 세운다.

특이한 것은 도척면 방도1리의 돌장승이다. 도로를 내면서 장승을 없애버리자 몇 년간 마을에 자꾸 우환이 생겨 5년 전 다시 세웠다. 그때 반영구형인 돌장승이 됐고 모습도 신랑 신부를 닮은 신식 장승으로 탈바꿈했으며 솟대는 없어졌다.

광주의 장승들 가운데 엄미리와 무갑리 장승은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다. 엄미리는 유래가 선명하고 잘 생겼다는 점에서, 무갑리는 신앙성과 장승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손꼽힌다.

남한산성 후문 아랫마을인 엄미리에서는 병자호란 때 죽은 장수들의 원혼이 마을에 해코지를 해, 그 영혼을 달래고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 장승을 처음 세웠다고 전해져 온다. 3백50년 가까운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장승으로 연대가 확인된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서문안 돌장승(1689년)과 시기가 비슷하다.

외모도 미끈해 나무장승으로는 조형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안팎의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장승들이 4년째 새 식구를 맞지 못했다. 당주(제관)를 맡으려는 사람이 없어 2년마다 하던 장승제를 두 번이나 걸렀다.

무갑리 장승의 '영험'은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다. 2년마다 음력 2월 초에 지내는 고창굿(장승제)날이 잡히면 부정을 가리는데 이 기간에 아이를 때린다거나 욕하고 싸움을 하면 장승할아버지가 벌을 내려 사람 몸이 굳어지거나 변고가 생긴다고 주민들은 믿는다.

고창굿 날에는 사람이 죽어도 그대로 두고 날이 바뀌기를 기다릴 정도다. 장승제 다음날에는 온 마을이 집집마다 음식을 장만해 모여 동네잔치를 벌이는데 이웃 마을 사람들도 찾아와 함께 즐기고 복을 나눠 간다.

이처럼 장승의 주된 소임은 온 마을이 함께 어우러지는 대동(大同)정신의 중심이자 마을 지킴이이며 부수적으로 이정표 구실도 했다.

장승의 유래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사람 형상의 장승이 나타난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농촌공동체의 급격한 변모 속에 그 전승력이 급격히 쇠약해져 이제 장승의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게 됐다.

광주의 장승들은 서울을 벗어나 조금만 나가면 의외다 싶게 가까운 곳에, 대도시 이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시골 풍경 속에서 홀로 사는 노인처럼 사람이 그립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며 서 있다.

더 사라지기 전에 찾아가 보자. 오가다 더우면 가는 곳마다 있는 개울가 숲 그늘에 앉아 탁족(濯足)을 해도 흉 잡힐 일은 아니다.

이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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