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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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6. 또다른 스승 이동백

비록 내 스승은 정정렬 선생이었지만 다른 명창께 배운 것도 말할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이동백 명창 이야기는 빠뜨릴 수 없다.

충남 태안 태생인 이동백 선생은 소리를 잘 해 고종으로부터 정3품 통정 대부 벼슬을 제수받은 분으로, 특히 1천일 독공 끝에 소리를 얻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선생이 종 치는 소리를 내면 영락없이 종이요, 뻐꾹새 소리를 내면 새소리 그대로였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새타령' 은 이날치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에 그렇게 잘 하는 분은 처음이라고들 했다.

중고제의 맥을 이은 분인 만큼 특히 선생은 소리를 처량하게 하지 않고 품위있게 하는 것을 강조하셨다.

당시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소리를 배우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모여 함께 소리를 하며 목을 풀었다.

한 번은 '수궁가' 의 한 대목을 부르며 목을 풀고 있는데 선생이 저 멀리서 듣더니 달려오더니만,

"너 이 놈들 왜 우냐. 토끼 화상을 그리면서 왜 울어. 화아~고옹~을 부울러라. 화아~고옹~을 부~울러 들여~. 이렇게 점잖게 불러야지" 라며 마구 꾸짖었다.

이동백 선생은 나를 아주 귀여워 하셨는데 이름 대신 "양녀야, 양녀야" 라고 부르곤 했다.

생김새가 '서양 여자' 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었다. 나는 이선생을 '할아버지' 라고 부르며 스스럼없이 따랐다.

특히 그 분은 성품이 호탕하고, 체구도 건장한데다 힘이 천하장사라 그에 관련한 일화가 많이 있다.

한 번은 이선생댁 방바닥을 뜯었는데 구들장 아래 금궤가 그득했다. 워낙 무거워 일꾼 네 명이 달려들어도 못 들고 있는데 환갑이 넘은 노인네가 "이 병신같은 놈들" 하더니 벌렁 제쳐놓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다른 금궤도 번쩍 들어 대청 마루에 옮겨 놓는 것이었다.

다들 놀라 할 말을 잃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껄껄 웃으며 "이 놈들아, 그게 그렇게 무겁냐?" 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대단한 어른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선생이 들려준 얘기도 생각난다. 젊은 시절, 공연을 하러 고향에 내려갔다가 생긴 일이라 했다. 대복소(지금의 분장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웬 사람이 천막을 쭉 찢으며 "이동백이 누구냐" 고 하는데 가만 있을 선생이 아니었다.

싸움이 붙어 동네 건달패들이 때려죽인다고 난리를 치니까 선생이 무대에 나아가 달려드는 건달 두 명의 발목을 양손에 하나씩 잡아 사람끼리 부딪히니 다들 혼비백산해 도망쳤다는 것이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 있을 때도 그렇게 기운이 좋았던 걸 보면 젊은 시절엔 과연 그럴만 했겠다 싶다.

이선생은 일본 글을 몰라 툭 하면 "얘, 양녀야, 읽어라" 하며 나를 불렀는데, 신문을 읽어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셨다.

당시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인데 신문을 읽어드리니 계속 "죽일 놈들, 죽일 놈들" 하시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중국을 침략한 일본 군대를 두고 하는 말인 줄 알게 됐다.

이런 사소한 것 말고도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소리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도 참 많이 배웠다. 그런데 한번은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호되게 혼나기도 했다.

여럿이 방에 모여있는데 선생이 "얘, 양녀야, 너희 선생 소리하고 내 소리하고 견줘보면 어떠냐□"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할아버지 소리는 판소리를 하고 저희 선생님 소리는 연극 소리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못 미더우신 듯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이번에는 거꾸로 "저희 선생님은 판소리를 하고 할아버지는 연극 소리를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정리〓김현정 기자

박동진 <판소리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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