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포럼] 쪽박이나 깨지말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안녕하십니까. 저는 미국에 사는 교포입니다. 6월 1일자 신문에 실린 국군포로에 대한 선생님 칼럼을 읽고 식사 한끼라도 대접하고 싶어 연락도 드리지 못한 채 어제 불쑥 한국에 왔습니다. 결례인 줄 알지만 시간 좀 내 주십시오. "

얼마 전 출근하자마자 걸려온 전화는 나를 잠시 어리둥절하게 했다. 칼럼 내용에 공감한다는 가벼운 인사 정도의 독자전화는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느닷없이 만나자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이튿날 점심시간, 만나자마자 그는 신상명세부터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안영덕. 45년생 충북 괴산 출신. 미국 오하이오 거주.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해병 예비역 병장. 가족은 부인과 2남. 직업은 부동산 중개업.

스포츠형 머리의 자그마한 키, 딱 벌어진 어깨에 근육질 몸매, 부리부리한 눈, 반소매 티셔츠 차림에 옆자리 손님이 깜짝 놀랄 만큼 쩌렁쩌렁한 목청…. 5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직선적인 말투나 성격이 첫 인상부터 그는 '영원한 해병' 이었다.

안씨는 미국 전쟁포로가족협회의 간부로 특히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가 국군포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베트남전의 아픈 경험 때문이라고 했다.

포로로 잡혀간 줄 여겼던 전우가 얼마 후 처참한 몰골의 시신으로 발견됐을 때 받은 충격이 잠시도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부대원의 절반 정도만 살아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는 전우의 '억울한 죽음' 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혼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70년대 초 안씨는 '살기 위해' 전재산 4백달러를 들고 단신 미국으로 건너갔다. 차돌 같아 보이던 안씨도 이 때의 고생을 얘기하면서는 목이 메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시민권을 얻기 위해 미군에 자원입대해 열살도 더 어린 미국 청년들과 함께 몇년간 군복무를 다시 했다.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수십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37세에 늦깎이 결혼을 한 그는 부동산업에 성공하면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국군포로 송환운동을 본격 시작한다.

포로 구조단체에 가입하고 국군포로에 관한 자료를 구하느라 며칠씩 차를 몰고 찾아가기도 했다.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업상 유리한 한인교회를 마다하고 미국인 교회에 다니며 국군포로 송환을 위한 미국시민 2천여명의 지지서명을 받아냈다.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김일성(金日成)을 만나고 온 뒤에는 수시로 카터를 찾아갔으나 충정은 이해한다면서도 만나길 꺼려했다.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도 찾아가보고 요즘도 한국전 참전 미군유해가 넘겨지는 하와이 미 육군신원확인소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북한의 유엔대표부에 가서는 "은밀하게 사재 2백만달러(22억여원)를 내놓을 테니 단 한 명이라도 보내달라" 고 제의해봤지만 그들은 "국군포로는 없다" 고 잡아뗄 뿐이었다.

"미국에서는 6.25 유해가 확인되면 지금도 성대하고 장엄한 장례식을 치릅니다. 의장대나 군악대는 물론이고 고향마을의 주민.학생들이 도열하지요. 성조기로 덮인 유해를 향해 경의를 표하면서 어릴 적부터 충성심.애국심이 저절로 우러나게 하는 겁니다.

이게 국가가 할 일 아니겠어요. 북한 비위를 거스를까봐 국군포로 문제를 거론하기조차 꺼리는 우리 나라와 너무 대조적이지요. "

안씨는 우리 나라 역대 정권들이 국군포로 문제를 너무 등한시했다며 자신이 누구를 위해 전쟁에 나가 싸웠는지 회의가 들더라고 했다.

1시간이 넘도록 열변을 토한 후 그는 가슴이 후련하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며칠 뒤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은 "6.25 직후 포로교환으로 끝난 문제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국군포로는 없다" 고 밝혔다. 그동안 북한이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 그대로였다.

미국에서 이 말을 들었을 안씨가 얼마나 흥분하고 가슴앓이를 했을까. 또 얼마나 허탈해했을까. 정부가 제 할 일을 다 못하는 주제에 남을 돕지는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권일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