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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영빈 칼럼

왜 국민은 불안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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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국민 5명 중 4명이 현 시국이 불안하다고 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잘한 일이란 개혁(7%)과 대북(7%)정책이 고작이고 잘한 일 없다는 의견이 48%를 차지하고 있다(중앙일보 9월 22일자 국민의식조사). 정국이 불안했던 DJ정권 말기인 2002년 9월 불안지수가 65%였던 점을 기억한다면 매우 높은 불안 수치다.

반미·친북 성향 탓으로 볼 순 없어

왜 그럴까. 노 정권의 반미 성향 탓인가. 아니라고 본다. 9.11 테러 이후 달라진 부시 정부의 외교국방전략이 일방적으로 치달으면서 노무현 정부가 허둥댔고 한.미 간 인적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이라크 파병 결정 이후 한.미관계가 악화됐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친북 성향 탓인가. 그렇질 않다. DJ정부 이래 대북정책 노선이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당시와 비교하면 오히려 후퇴했다. 북핵 문제 이후 노 정부의 대북정책은 현상유지에 불과하고 지금은 남북교류가 닫힌 상태다.

국가보안법 폐지 선언 때문인가. 현 정부와 여당의 보안법 폐지-대체입법론은 당초 인권유린 악법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인권적 접근이지 대북용 접근은 아니다. 북핵이 존재하는 한 보안법 폐지로 남북관계에 어떤 획기적 전기를 마련할 수 없다. 또 여당의 대체입법 당초안을 보면,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밝힌 정부 참칭 삭제와 명칭 변경을 할 경우 여야 간 대안이 크게 다를 게 없다. 반기업.반시장 정책 탓인가. 노 대통령이 TV대담에서 주장했듯 총액출자제한제를 빼고는 명백한 반기업적 정책이 나온 게 없다. 지난 칼텍스정유 파업 때 정부는 불법노조에 대해 칼처럼 선을 그었다.

그런데도 왜 국민은 불안해 하는가. 아시아개발은행(ADB) 보고서가 잘 지적했듯, 국정과제 설정(어젠다 세팅)이 잘못된 탓이다. 경제살리기가 국정 제1과제고 국가 어젠다여야 하는데 정치 세불리기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노 정부는 끊임없이 국민을 상대로 정치실험을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대통령이 측근비리를 문제삼아 국민 앞에 재신임을 묻겠다는 전격 선언을 한 이후 지금껏 꾸준히 집요하게 국민 마음을 심란하게 흔들고 있다. 지난 상반기 동안 재신임-탄핵-총선으로 이어지는 거창한 문제 앞에서 국민 모두가 갑론을박으로 세월을 다 보냈다. 대통령 지지도는 30%대를 넘지 못했지만 탄핵이냐 아니냐는 논쟁 속에서 대통령 지지도는 50% 가까이 올랐고 총선에서 여대야소의 극적인 정치적 성과를 거뒀다.

하반기도 유사한 과정을 답습하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과거사 청산.국가보안법 폐지로 여론을 흔들고 국민을 계속 시험에 들게 하고 있다. 여기에 틈틈이 '친일 군부세력이 3대를 떵떵거리며… ''강남사람들끼리 만나면… '운운 식의 계층 간.지역 간.이념 간 갈등을 헤집는 발언을 끼워 넣고 있다.

왜 경제살리기에 주력하지 않고 정치 세불리기에만 골몰하는가. 여기에 국민 불안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첫째, 노 정부의 국정과제 설정 방식이 지나치게 갈등 분열적이기 때문이다. 탄핵이냐 아니냐, 친일이냐 반일이냐, 보안법 폐지냐 개정이냐, 공주.연기냐 서울이냐 모두 경제와 무관한 사안을 제기해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대통령이 보안법을 시대상황에 맞게 고쳐 보자는 원칙적 제안을 했다면 국론이 이렇게 분열하고 보수.진보 원로가 패를 나누는 흉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권 스스로 퇴로를 차단하고 국민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편가르기를 하니 국민이 불안한 것이다.

갈등·분열 통한 세력 결집 나서

둘째, 사회적 명분이 강하고 도덕성 높은 어젠다를 제기해 낮은 대통령 지지도를 높이면서 갈등을 통한 세력 결집을 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신임-탄핵-총선에서 성공한 전술을 다시 수도 이전-과거사 청산-보안법 폐지 논란을 통해 정권 재창출 기반을 다지는 정치적 전술로 보지 않고서는 노 정부의 국정과제 설정 방식을 이해할 길이 없다. 과거사 청산으로 시간을 제압하고 수도 이전 논란으로 공간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대선에 올인하는 과정이 노무현식 어젠다 세팅 방식이 아닌가. 경제엔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데 정권이 3년여 남은 대선에 올인한다는 의혹이 있기에 국민이 불안해 하지 않는가.

이런 해석이 가당치 않다면 갈등분열보다는 통합조정으로, 과거 회귀적이기보다는 미래지향적으로, 죽기 살기 편가르기보다는 절충과 타협의 상생.중용정치의 면모를 국민 앞에 보여라.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