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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안 낳는 사회] 7. 일이냐 결혼이냐 - 그 갈림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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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에서 탈피해 남녀가 자유롭게 교류하는 파티 문화가 2030세대 여성에게 인기다. 사진은 18일 오후 ‘클럽 프렌즈’가 연 파티에서 참가자들이 담소하는 모습. 김상선 기자

대학 졸업 후 인터넷 포털업체에서 일하던 박주은(28)씨는 2년 전 직장생활을 접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늘 가슴 한편에 꿈꿔왔던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디자인 대학원에 재학 중인 그는 "원했던 일을 하는 지금이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결혼 계획을 묻자 박씨는 "유학 직전에 혼담이 오간 적이 있지만 내 인생의 목표를 이루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결혼은 공부를 마치고 일자리를 잡은 뒤 33세쯤 서로에게 윈 윈이 될 수 있는지를 따져본 뒤 할 것"이라고 했다.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결혼을 한 뒤 자녀를 꼭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드물다.

본지가 지난달 말 미혼 남녀 53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75.5%가 '결혼은 선택일 뿐'이라고 응답했다. 특히 여성의 경우엔 결혼과 출산을 선택 사항이라고 답한 비율이 각각 86.9%, 72.9%로 남성(66.4%, 64.4%)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장혜경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위원은 "여성은 남성보다 가사.양육에 대한 부담이 커 결혼과 출산을 더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다"고 분석했다.

◆ 결혼보다 일과 자아실현이 중요=여성들이 결혼을 꺼리는 현상은 이웃나라 일본에서 한발 앞서 나타났다. 경제적 독립을 이룬 일본 여성들이 갈수록 결혼을 기피해 20대 후반(25~29세) 여성의 절반(54.0%), 30대 전반(30~34세)의 4분의 1(26.6%)이 아직 미혼이다(2000년 일본 총무성 조사). 재일동포 언론인 박금순씨는 "외무 공무원이었던 마사코(雅子) 왕세자비가 결혼할 당시 많은 일본 여성이 부러워하기는커녕 일을 포기하는 걸 안타까워했다"면서 "여자는 결혼하면 손해를 보기 때문에 연애만 하는 게 좋다는 가치관이 일반화됐다"고 전했다.

우리나라 미혼 여성들 역시 결혼보다는 일과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치관이 바뀌고 있다. 잡지 '싱글즈'가 지난달 25~35세 미혼 여성 1000여명에게 최대 관심사를 물었더니 인생의 방향(38%).돈(25%).능력(21%)을 꼽은 이가 결혼(16%)보다 훨씬 많았다. '결혼 계획이 없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도 '일에 열중하기 위해서'(26.2%)라는 대답이 1순위였다. 학력이 남성 못지 않게 높아지고, 일하는 '커리어 우먼'이 많아지면서 여성들의 자의식이 커진 것이다.

◆ 가정.사회의 의식은 제자리걸음=여성의 의식이 급변하는 것과 비교하면 가정과 사회의 의식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여성들은 그 격차로 인한 갈등 때문에 점점 더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고 있다.

넉달 전 딸을 낳고 직장에 복귀한 김모(31)씨는 요즘 밤마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느라 잠을 설쳐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육체적 피로보다 더 괴로운 것은 아이 보기를 나 몰라라 하는 남편의 태도다. "자기나 나나 일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아이가 운다고 각방을 쓰자고 하지 않나, 주말에는 낮잠만 자지 않나. 도대체 누구 아이를 낳은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는 "예쁜 딸을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가끔은 결혼한 것 자체가 후회된다"며 "절대로 둘째는 낳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맞벌이가 크게 늘면서 여성들은 집안일을 공평하게 분담하기를 원하지만, 가사는 여전히 아내의 몫인 경우가 대부분(88.9%)이다(2002년 통계청 조사). 자녀 양육의 책임 역시 엄마가 주로(82.8%) 맡고 있다(2003년 한국여성민우회 조사).

기혼 여성은 취업기회 제한, 승진상 불이익 등 직장에서도 이런저런 차별을 당하기 일쑤다.

'20대 중반인 제 주변엔 결혼하지 않겠다는 친구가 더 많습니다. 저도 결혼하지 않거나, 35세가 지나서 할 생각입니다. 딸로 태어났어도 남의 집 아들과 똑같이 대학 나오고 배울 것 다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보니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이 이만저만 아니더군요. 이제 겨우 자리 잡고 일하려는데 결혼해서 임신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나를 포기할 수 없으니 결혼과 아이를 포기해야 하는 거죠.'(ID kiesd***)

최근 인터넷 '다음' 사이트의 저출산 관련 토론방에 오른 글 속엔 성차별적 분위기 때문에 직장과 결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고민이 생생히 녹아있다. 이연주 하와이대 교수(사회학과)는 "맞벌이 사회에서는 양성(兩性)평등 의식이 얼마나 정착돼 있는지도 여성의 결혼.출산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스웨덴.덴마크의 경우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70% 이상인데도 불구하고 출산율이 우리보다 높은 1.5~2.0명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 특별 취재팀=김시래 팀장,신창운 여론조사전문위원,문경란 여성전문기자,신성식.신예리.박혜민.김영훈.김정하.하현옥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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