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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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4. 열일곱 순정

내 젊은 시절을 얘기 하자면 여인들을 빼놓을 수 없다.

명월관에서 머물던 때 나는 열일곱 나이로 난생 처음 '여자' 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팔려온 기생이었는데, 소리를 가르치던 내가 자기보다 어리다는 이유로 선생 대접을 하지 않고 농을 던지거나 방으로 놀러오라는 등 눈치가 심상치 않았다.

어느 비오는 날 숙맥이던 나는 그녀에게 이끌려 거의 강제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주인이 알까봐 두려웠고 세상이 알까봐 겁이 났다.

그 일이 있은지 오래지 않아 추석을 맞았다. 나는 열심히 모은 돈 45원을 가지고 수년 만에 고향집을 찾았으나 가세는 더욱 기울어 있었다.

부모께 집과 땅을 사드리고 김천으로 돌아가려고 할 즈음 주인으로부터 돌아오지 말라는 편지를 받았다.

기생과의 일이 알려져 술집 심부름꾼이며 주방장들이 "나이도 어린놈이…가만 안 둔다" 고 벼르고 있다는 게 아닌가. 나는 또다시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디를 가야 하나' . 궁리하던 끝에 기생이 많다는 대구로 향했다.

당시 '대구에 있는 기생 수랑 파리 수랑 견주면 파리가 두 마리 모자란다' 고 말할 정도였다.

가야금의 명인으로 소문난 박상근씨를 찾아 갔다. 박씨는 공부도 많이 해 아주 유식한 분이었다. 머리를 땋은 소녀던 성금련씨도 박씨에게 가야금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박씨의 보조로 있으면서 대구 권번의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쳤다. 나한테 소리를 배운 기생만 해도 7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대구생활에 익숙해질 즈음, 김천 명월관의 주인이 와서 "네가 보고 싶어 왔다. 이제 사태도 수습됐으니 같이 가자" 고 해 다시 김천으로 내려 왔다.

그런데 나에게 온갖 사랑의 맹세를 했던 그 기생은 그새 딴 남자와 정분에 빠졌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여자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면서 다시 대구로 왔다.

대구에는 나를 귀여워해 준 김한식씨가 있었는데, 그 지역 인력거꾼들을 총감독하는 이였다.

그 분은 "기왕 소리를 배우려면 무식하게 하지 말고 유식하게 하라. 삼국지 적벽가를 배워야 한다" 고 말했다. 그 말에 이끌려 조학진 선생으로부터 적벽가를 배우게 되었다.

조선생은 약밥을 팔러 다닌다고 해서 일명 '약밥쟁이' 로 불리는 노인이었다.

원래는 전남 광주 출신이나 소리꾼을 "얘, 쟤" 하며 멸시하는 광주의 풍토를 견디다 못해 대구로 옮겨왔다고 했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조선생의 소리를 알아주는 이가 없어 약식을 팔아 생계를 잇고 있었다. 하루에 50전을 드리고 한 달간 소리를 배웠는데 다른 사람 같으면 4~5년 걸릴 공부였다.

소리공부에 몰두하며 사랑의 상처를 달래던 나는 또 한차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상대는 내가 머물던 집 길 건너에 있는 전당포 가게 딸인 일본인 학생이었다. 상냥하고 싹싹한 그녀에게 홀딱 반해 결혼을 전제로 몇 달간 교제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밤중에 자고 있는데 형사들이 구둣발로 들이닥쳤다. 형사들은 다짜고짜 나를 경찰서로 끌고 가 "네 놈 때문에 대구에 여자들이 남아나지 않는다며? 저런 놈은 얼굴을 인두로 지져야 한다" 며 으름장을 놓았다.

한바탕 혼이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 다른 선생들이 입을 모아 "어서 대구를 떠나라. 너 때문에 이 지역 선생들이(경찰에)다 불려갔다" 며 통사정을 하는 게 아닌가.

다시 경주로, 건천으로 전전하며 기생들의 소리선생 노릇을 계속했는데, 가는 곳마다 이들의 등쌀에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여자 때문에 산전수전을 겪은 나인지라 초연해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정리〓김현정 기자

박동진 <판소리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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