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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이산가족 상봉 추진회장 이경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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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남북한 이산가족문제는 우리 민족의 못난 꼬라지 가운데 세계적 창피다.이미 타계한 실향민의 넋들은 구천을 떠돌고,남은 1백23만명 이산 1세대는 그저 노안을 적시고 있다.

그렇게 통한의 50년이 흘렀다.그리고 남북정상의 역사적‘6.15선언’은“8.15를 즈음하여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라고 썼다.

경하할 일이다. 그러나 가족의 생사조차 모른 체 늙어버린 실향민의 처지를 떠올리면,“이제 와서 고작…”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이제 고작”이란 표현이 실례인줄 잘 알지만,실향민으로서는 장강의 세월이 한스러울 테고 또 ‘방문단’이 일과성 행사가 아닌지,아니면 생사확인·서신교환·면회소 상설로 발전하려는지 걱정이 앞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극소수의 이산가족들은 음지의 경로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처지를 알리는 편지를 주고받아 왔다.몇 몇 가족은 어두운 두만강가에서 상봉의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라라고 생긴 게 일제에게 먹히고, 외세에 분단되고, 전쟁터로 남편·자식 내몬 것말고 해준 게 뭐냐’라고 어느 소설에 써있지만, 이산가족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군축의 의미 이상 화해와 공존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산가족상봉추진회 회장 이경남(70·시인·언론인)씨는 그 자신이 월남실향민으로, 이산가족 사이의 서신왕래 성사를 필생의 업으로 삼고 있다.

1995년 설립된 이 단체는 그동안 3백여 이산가족의 서신 및 금품 전달을 성사시켰으며 10여 가족의 직접 상면도 주선했다. 이씨는 89년 실향민들의 출자로 동화은행(후에 신한은행에 합병)이 출범할 때 함께 설립된 실향민문제연구소인

‘동화연구소’소장으로 지난달까지 11년간 재직한 실향민문제 전문가이다.

이씨가 복사해 보관하고 있는 북에서 온 편지 3백여통은 대부분 ‘어머니·아버지·누님·삼촌은 언제 돌아가시고,손주·조카의 이름은 뭐 뭐’라는 내용이다. 50년 격절 끝의 편지에 무슨 말을 쓸 것인가.호칭 하나 하나가 가장 절박하고 뜨거운 눈물일 터이다.

‘체제의 감옥’에 갇힌 이산가족간의 연락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으며 그 과정의 사연을 알아보는 까닭은 이산가족의 한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야 되기 때문이다.

-북에 있는 가족을 찾는 첫 단계는 어떻게 시작합니까.

“남한의 실향민이 북한의 어디에 살고 있던 누구의 생사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해옵니다.그러면 편지를 작성해 제3국의 중개인에게 전달하고 그가 북에 들어가 가족인지 진위를 알아본 뒤 맞으면 답신을 받아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북의 가족으로부터 진위 확인이 쉽지 않을듯 한데요.

“신청자에게 편지쓰는 방법을 가르칩니다.우선 헤어질 때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도록 하지요.예를 들어 동짓날이었나,눈이 내렸나, 집에서 혹은 동구 밖에서 헤어졌느냐, 등에 업은 애기가 울고있었나 등을 떠올리게 하여 그대로 쓰게 합니다. 에이전트가 찾아가면 북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가 본능적으로 “그런 사람 없다”며 부인합니다.당연한 반응이지요.그러나 편지를 보여주면 당사자들만 아는 내용이니까 경계심이 풀어지고 그 때부터 서신교환이 시작되지요.”

-어떤 이들을 중개인으로 활용합니까.

“제3국의 사람으로 보따리장수를 비롯해 이런저런 신분으로 북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또 북한 사람 중에서도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성사율은 어느 정도 됩니까.

“30% 정도입니다. 성사가 안되는 경우는 찾을 사람이 이미 사망했거나, 손이 못미치는 곳으로 이사했거나, 상대방이 수취를 거부할 때입니다. 또 중개인이 ‘배달사고’를 낼 경우도 있지요.”

-답신에는 주로 어떤 내용이 담겨있습니까.

“50년만의 첫 연락이니까 그동안의 가족 상황을 알리는 것이지요.예컨대 아버지 묘는 어떻게 쓰고,결혼은 언제했으며 자식은 누구를 뒀고 일가 친척은 어떻게 지낸다는 내용입니다. 답신의 절반 정도는 ‘북의 체제, 장군님 은덕에 잘 산다’고 하면서도 대개는 금품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1차 접촉이 이뤄지면 편지 왕래나 금품지원이 계속됩니까.

“그렇게 되는 게 많지만 그걸로 끊기는 경우도 있습니다.금품을 전달 할 때는 북쪽에서 이것저것 부탁해 옵니다. 달러를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시계·의류·의약품 같은 걸 주로 부탁하지요.금품을 줬을 땐 에이전트 편에 보내는 답장에 반드시 무엇무엇을 받았다고 쓰게합니다. 일종의 영수증으로 배달사고가 안나게 하는 거지요.”

-그런 배달사고가 자주 나는 모양이지요.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나 중개인들은 배달 수수료를 받고 일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욕심을 낼 수도 있거든요.”

-서로간 근황을 알게되고도 후속 연락이 끊기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헤어진 상황에서 가족간에 여러가지 이유로 이질감이 생긴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인천에 거주하는 어느 70대 실향민은 평남 안주에 두고온 아내·3자녀와 편지연락이 되었지만 2번째 편지를 못보내고 말았어요. 북의 답신에는 금품 지원을 요청하는데 남한에서 재혼한 부인과 아들이 반대했기 때문이지요. 경제권이 없는 노인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지요.

또 어떤 노인은 북에 있는 여섯명의 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해 중개인이 어렵사리 찾아넸지만 여섯명 중 두 명이 노동당 지방조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서신교환을 계속했다간 동생들 전체에 화가 미칠까봐 포기했습니다.”

-첫 연계가 이뤄진 뒤 다시 연락하지 않으면 북에 있는 가족이 굉장히 궁금해 할 것같은데요.

“그렇습니다.이북의 가족들은 첫 답신을 쓸 때 80% 정도가 계속 서신교류와 금품지원을 원합니다. 그런데 첫번 편지 한 번으로 끊어지면 정말 목이 빠지게 편지를 기다리다가 서운한 생각에 마음에 멍이 들고 그 다음에는 그럴 바에는 무엇때문에 소식을 전해 왔는가 하고 원망을 합니다. 남쪽의 사정을 알 수가 없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 남쪽의 가족도 북의 가족을 찾을 때 여러가지 현실적 고려도 해야 합니다.차라리 모르고 서로 그리워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거든요.”

-남한 가족이 부담하는 경비는 어느 정도 됩니까.

“서신으로 생사를 확인하고 교류하는데는 1천불쯤 됩니다.우리 추진회에서는 착수금 같은 것은 안받고 성사가 됐을 경우에만 경비를 받습니다. 우리로서는 성사가 안됐을 때도 제반 비용이 들지만 그 손실은 추진회의 설립 기금에서 충당합니다. 영리목적의 사업이 전혀 아니기에 실향민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지울 수 없다는 취지때문입니다.”

-직접 상봉을 주선하는 경우는 경비가 더 많이 들 것같은데요.

“ 약 1만불이 드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직접 상봉에는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거기에 드는 시간과 노력을 서신연락에 집중하면 훨씬 더 많은 접촉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두 가족이 직접 만나는 것은 그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그건 그 가족에게 국한되는 것입니다.”

이산가족상봉추진회는 95년 이씨와 동향 실향민이자 오디오기기 인켈 창립자인 조동식 회장이 기금을 출연하고 당시 동화연구소 소장인 이씨가 실무를 맡아 출범했다. 현재 이씨는 상주 직원 4명과 더불어 이 일에 전념하고 있다.

-현재 북측 가족과 연락을 바라는 신청자는 얼마나 됩니까.

”천명 단위라고 해둡시다.이 중 절반은 성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청자가 너무 많으면 우리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신청만 받아 놓고 안되면 실향민들 마음만 더 아프게 하는 것이지요.“

-물건 전달은 부피도 있고 해서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합니까.

“아무래도 부피기 적은 것,생필품이나 의약품 위주로 갑니다. 그리고 북한 당국이나 주민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중국제로 구입해 전달합니다.”

-돈이나 물건을 개인적으로 전달할 때 북한주민들 간에 위화감도 생기지 않을까요.

“사실 그 점이 우려됩니다. 앞으로는 북의 고향 단위로 금품을 지정 기탁하고 나아가 현지의 식품·의류 등 공장을 지원하는 방법이 병행돼야 합니다.”

-북의 가족이 편지 수취를 거부하는 이유는 뭡니까.

“중개인이 찾아냈어도 약 20%가 수취를 거부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지요. 하나는 철저한 이념 무장때문이고 또 하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둘째 경우에는 계속해서 마음을 누그려뜨리도록 노력합니다.”

-수취거부 땐 남쪽 신청자에게 사실대로 알리기가 거북하겠습니다.

“이념문제 때문에 못받겠다고 하더라 같은 말은 되도록 피하고 그냥 “북쪽 가족이 잘 알았다고 그럽디다”고 하면 대개 이해하면서 물러나지요.”

-이번 ‘8.15 방문단 교환’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일회성에 그쳐서는 안됩니다.이산가족의 문제는 결코 이벤트가 안됩니다.1백∼2백명만 가족을 만나고 오면 나머지 1백수십만 이산 1세대는 오히려 마음만 더 아플 겁니다. 수순이 중요합니다. 우선 생사와 현거주지를 확인하고, 편지 왕래와 금품의 우편송달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 다음 수개처에 면회소를 설치 운영하고, 도 단위의 고향방문단 교환과 시·군 단위로의 확대가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지요. 그런데 이번 합의는 전체 이산가족의 생사확인과 서신교환 같은 선결 과제를 생략해버린 꼴입니다.

가령 1만명이 굶주리고 있으면 밀가루나 국수를 조금씩이나마 배급해야지 그중 한 두명만 뽑아내어 쇠고기로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실향민을 대상으로 한 동화연구소의 여론조사에는 72%가 생사확인,편지교환을 선결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래도 지난 15년간(85년 서울·평양 고향방문단 교환이 한차례 있었다)의 단절에 비하면 획기적이지 않습니까.

“일과성이 아니고 계속 된다면 물론 평가가 달라집니다. 그렇더라도 순서는 내 말대로 돼야 합니다.그리고 선언문 문구인 ‘방문단을 교환하며’도 우리 어문법상 방문단 교환을 1회만 실시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이는 ‘방문단의 교환을 시작하며’로 했어야 합니다.남북 적십자 협의에서 우리측 주장이 옹색해질까 걱정됩니다.”

이씨는 북한에 있는 누이동생 둘의 생사를 모른다. 알아보고는 싶지만 다른 실향민 가족의 문제를 일부나마 해결하겠다고 나선 사람으로서 민망한 일이고 그보다는 자신의 남다른 이력 때문에 혹시 나쁜 영향을 끼칠까 해서다.

그는 6.25전쟁중 그 유명한 구월산 반공유격대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스스로를 “한국현대사의 격랑기에는 젊은 육탄으로 투신했고, 노년에는 인도적 사업에 힘을 썼으며,가고자하는 고지는 통일된 고향”이라고 평가했다.

본지 편집위원

<이경남은 누구>

▶1929년 황해도 출생

▶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평양사범대 중퇴

▶51년 휴전 때까지 구월산 유격대에서 게릴라전 전개

▶57년 육군 정훈장교 예편

▶65년까지 ‘신태양’‘여상’지 편집장

▶75년까지 현대경제일보 문화부장,편집국장

▶87년 ‘현대공론’발행·편집인

▶89-2000년 동화연구소 소장

▶95년 이산가족상봉추진회 회장

▶57년 ‘현대문학’통해 시인 등단

▶(저서)시집‘북창에 어리는 별’,실록‘운명의 4일’ 전기‘설산 장덕수’등 다수

▶금성무공훈장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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