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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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3.'스카우트'

배에서 내릴 때 사공들이 "너 소리는 잘하니까 그만 배우고 사공질을 하라" 고 꼬드겼지만 '내가 늬들보다 훨씬 낫게 될 거다' 고 다짐하며 세차게 고갯짓을 했다.

18전을 주고 명태 한 마리를 사고 술을 한 되 받은 후 20리 길을 물어가며 손병두 선생 집을 찾아갔다. 도착했을 땐 달이 훤히 밝은 후였다.

조그마한 양반이 "뉘여?" 하며 문을 열고 나왔다.

대전에서 소리를 배우러 왔다고 하니 부부가 자는 단칸방 웃목 한구석을 내주며 "밤이 깊었으니 그만 자라" 고 말씀하셨다.

이튿날 아침, 선생은 소리 한 토막을 해보라고 했다. 이것저것 읊어대자 "너 목은 참 좋은데 장단도 안 맞고 말도 안 된다. 그런 소리를 가지고 어딜 다니느냐?" 고 호통을 쳤다.

나무도 하고 모도 심는 등 머슴살이를 하면서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다섯 달을 살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그 댁 아주머니인데, 전주분으로 인물이 아주 고운 분이셨다.

원래 양반집 며느리였으나 선생의 꽹과리 소리에 반해서 집을 나와 손선생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라 했다.

어느날 손 선생은 '춘향전' 책을 사와 아무렇게나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르칠 밑천이 바닥난 눈치였다. 어렵게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저 딴 데로 갈랍니다. 선생님이 장에 가서 책을 사오시고 자작해서 가르치시는 걸 보니 밑천이 다 떨어지신 모양입니다."

"그래. 밑천이 다 떨어졌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나와 함께 갈 곳이 한 군데 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윤씨라는 부자 양반댁이었다. 소리에 대해 평가를 잘 하고 소리 선생을 많이 안다는 것이 그 곳을 찾은 이유였다.

방에 들어가니 손님이 오셨다며 며느리, 딸, 아들, 손자까지 모두 악기를 하나씩 들고 나와 풍류를 연주하는데 난생 처음 듣는 그 소리가 아주 좋았다.

내가 소리를 하니 윤씨는 "너 장래에 크게 될 놈이로구나. 지금 저 선생은 잡가(민요)선생이다. 저 선생한테 뭘 배우겠느냐? 내가 좋은 선생을 한 분 소개해주겠다" 하는 게 아닌가.

그 분이 나중에 내가 스승으로 모신 익산 사는 정정렬 선생이다. 윤씨는 정선생이 춘향가를 제일 잘 하는 분으로, 목은 안 좋지만 가르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걸어서 강경을 거쳐 어렵사리 이리(지금의 익산시)에 다다랐으나 정 선생은 서울에 가셨다는 황망한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그 집을 뛰쳐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마땅한 스승을 만나지 못한 나는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내가 뭐가 되려고 이러나' 싶어서 잠도 오지 않았다.

어느날 유성에 나갔다가 우연히 삼류 소리꾼들이 공연하는 무대에 섰다.

구멍난 양말에 웃통을 벗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기에 소리를 들은 구경꾼들은 "투가리(뚝배기)보다 장맛" 이라는 말을 연신 해댔다. 철모르는 마음에도 환영을 받으니 그저 좋을 뿐이었다.

공연 후 소리꾼들과 어울려 저녁을 먹는데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며 나를 찾았다.

뭘 잘못 했나 싶어 겁을 내며 문을 열었더니 웬 경상도 아주머니가 "니 좀 나온나" 하며 나를 끌고 나갔다.

알고 보니 그 분은 경북 김천에 있는 진양옥이라는 술집 주인으로 내 소리에 반해 기생들의 소리 선생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지라 나는 냉큼 따라 나섰다. 진양옥에서 두어 달을 지내던 중 근처에 있는 명월관이라는 술집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김덕수라는 노인이 주인이었는데, 내 소리를 듣더니 "네 월급은 15원이다" 라고 선뜻 말했다.

당시 군수의 월급이 12원이니 여간 큰 돈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기생집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정리〓김현정 기자

박동진 <판소리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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