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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사고파는 거래 아니죠

중앙일보

입력


직장인 유인선(39·일산동구 장항동)씨는 몇주째 눈에 거슬리던 거실 형광등을 얼마 전에야 교체했다. “깨진 형광등을 갈아끼워야 하는데 손도 닿지 않고 혼자 살다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매번 친구에게 부탁하기도 미안하고….” 품앗이 사이트 ‘선물(durecenter.or.kr)’에 올린 유씨의 사연에 고양파주두레생협(이하 두레생협) 오동욱 상무이사가 선뜻 ‘키다리 아저씨’를 자청하고 나섰던 것. 유씨는 답례로 그에게 1000두루(가상화폐)를 지급했다.

결혼 20년차인 유광숙(45·덕양구 선유동)씨는 이달 초 이 사이트를 통해 모인 주부 10여 명을 대상으로 ‘고추장 담그기’ 강좌를 열었다. “사먹는 데 익숙한 젊은 주부들에게 장 담그는 법을 일러주고 싶었다”는 유씨는 “내가 가진 솜씨를 나눌 수 있어 뿌듯했다”고 말했다. 유씨가 직접 유기농으로 재배한 고추장 재료를 써 참가자들의 호응이 더욱 컸다. 유씨는 참가자들로부터 5000두루(재료비 별도)씩 받았다.

물품과 품 나누는 시장

‘선물’은 두레생협이 회원 중심으로 지난 10월부터 운영하는 온라인 품앗이 사이트다. 이곳에선 ‘돈’ 없이도 텃밭에서 기른 채소, 직접 만든 반찬 등 각종 생활재를 사고 팔 수 있다. 거래 시 결제수단은 가상화폐 ‘두루’를 사용한다. 1두루는 현금 1원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모든 거래가 두루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고추장 담그기처럼 재료비가 필요한 경우엔 현금도 쓰인다. 단, 전액 현금결제는 할 수 없다. 품목에 따라 다르지만 두루의 사용 비율이 최소 30%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

‘선물’에선 눈에 보이는 물품 뿐 아니라 ‘품’도 오간다. 아기 돌보기, 자전거 타는 법가르쳐 주기, 집수리 등 노동력과 기술·재능을 제공하는 일들도 포함된다. 우리나라 농번기에 일손을 나누던 두레나 품앗이와 흡사하다.

두레생협 박경희 이사장은 “돈이 오가는 ‘거래’에서 벗어나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는 호혜적인 ‘돌봄’이 선물의 운영 방식”이라고 소개했다.

잔고가 적자여도 거래 가능

거래 사항은 온라인 통장에 기재된다. 물품이나 품 제공자는 ‘흑자(+)’, 이용자는 ‘적자(-)’로 기록된다. 앞에 소개한 고추장 강좌가 5000두루에 거래됐다면 고추장 담그는 비법을 전수한 유씨 통장 잔고는 +5000두루, 강좌 참가자는 -5000두루가 된다. 유씨는 잔고 금액만큼 다른 물품이나 품을 얻을 수 있다. 잔고가 적자여도 거래는 가능하다. 일반적인 의미와 달리 품앗이에서의 적자는 그만큼 적극적인 참여를 뜻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거래는 온라인에 직접 등록해 진행한다. 품목·가격·결제조건(현금과 두류 사용 비율)을 올리면 교환에 응할 회원이 댓글이나 전화로 교환조건과 방법을 협의하게 된다. 거래의 전 과정은 제공자와 이용자 당사자 간의 자율적인 판단과 합의에 따른다. 품목 제한은 없다. 다만, 지나치게 상업적인 거래라든지 상식과 품앗이 취지에 어긋나는 품목은 제한될 수 있다.

갈 길은 아직 멀다. “초창기여서 물품 위주의 물물교환이 대부분”이라는 박 이사장은 “앞으론 일상에서 주고 받을 수 있는 다양한 ‘품’ 개발이 과제”라고 말했다.

“최근 이웃들 도움으로 늦둥이 돌잔치를 치렀다”는 변혜경(42·일산동구 장항동)씨는 “잠깐 아이 봐주기, 특별한 날에 축가 불러주기 등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더욱 많아져 도시에서도 ‘이웃의 정’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물’은 먹을거리 협동조합인 두레생협(출자금 3만원) 회원제로 운영된다.

[사진설명]품앗이 사이트 ‘선물’을 통해 텃밭에서 가꾼 채소를 거래한 김재순(51·左)·일산서구 가좌동)씨는 “내년 농사 지을 생각에 벌써부터 봄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문의= 031-919-0520

< 김은정 기자 hapia@joongang.co.kr >

< 사진=황정옥 기자 ok76@joongang.co.kr / 그래픽= 박세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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