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폐업 첫날 스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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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각급 병원들이 집단폐업에 돌입한 20일 전국의 종합병원은 비교적 한산했으나 보건소는 몰려든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또 입원 환자들이 강제퇴원을 종용하는 병원측과 마찰을 빚는가 하면 응급환자들이 번번이 진료 거부를 당해 고통 속에 진료기관을 찾아 전전하는 불편을 겪었다.

◇ 대형 병원〓서울시내 대학.종합병원 등은 이날 폐업 사실이 널리 홍보돼 접수창구는 크게 붐비지 않았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교수 인력을 총 동원, 일부 예약 환자를 진료하고 응급의학과 교수 3명으로 응급실을 운영하는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하지만 응급실에는 의외로 환자가 적어 오후까지도 58개의 병상이 다 차지 않을 정도여서 진료에 차질이 없었다.

서울대병원은 19일에 이어 입원환자들을 계속 퇴원시켰고, 이에 반발하는 일부 환자들이 병원측에 격렬히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간이식수술을 받기 위해 19일 1차 수술을 받은 간암환자 李모(65)씨는 "검사 결과를 보고 다시 수술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의료진이 없다며 오후 2시에 퇴원해 달라고 했다" 며 "도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고 난감해 했다.

전공의 3백여명이 폐업에 돌입한 한양대병원의 접수창구 등에도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발길이 평소보다 적었다.

삼성서울병원.서울중앙병원.강남성모병원 등에선 일부 예약환자를 제외한 초.재진 등 모든 일반진료는 이뤄지지 않았고 응급실만 소수 인력으로 가동했다.

"어린 딸 6시간 방치"

생후 13개월 된 딸이 포크 조각을 삼켜 이날 오전 2시쯤 부산대병원 응급실을 찾은 문모(38.여)씨는 "딸아이의 목이 심하게 붓고 열이 많아 애타게 의사를 찾았지만 간호사가 아이의 체온만 잰 뒤 6시간이나 방치했다" 며 "의사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이렇게 환자를 내팽개쳐도 되느냐" 고 말했다.

韓모(33.여.서울 광진구 구의동)씨는 생후 2개월 된 딸이 설사와 구토로 탈진상태에 내몰렸지만 4시간30여분 동안 광진구 일대 소아과.내과.정형외과 등 10여곳의 병원과 광진구보건소에서조차 치료를 받지 못하다 오후 1시30분이 돼서야 방지거병원에서 급한 응급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방지거병원 담당의는 "급성장염으로 조금만 늦었으면 탈수상태에까지 갔을 것" 이라고 밝혔다.

韓씨는 "경황이 없어 의료보험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일반병원뿐만 아니라 보건소에서조차 진료거부를 당했다" 고 말했다.

병원가면 "약국 가봐라"

◇ 동네 병.의원〓대형 병원들의 폐업과 함께 서울시내 동네 병.의원들도 대부분 문을 닫아 서민들을 애타게 했다.

서울 용산구의 경우 H의원.H소아과.D의원 등 대부분의 동네의원이 오전부터 셔터를 아예 내린 채 진료하지 않았고 서울 중구 S아동병원은 원장.부원장 2명만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응급실을 지켰다.

장염에 걸린 2세된 아들을 안고온 吳선미(30.여)씨는 진료시간이 지체되자 "의사들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이권만을 주장할 수 있느냐" 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경우 일대 동네 의원 대부분이 이날 오전부터 셔터를 내린 채 진료하지 않았고 병원에는 문의전화만 쏟아졌다.

서울 서초구 C병원을 찾은 당뇨병 환자 金모(65)씨는 "간호사들에게 약이라도 달라고 했지만 무조건 약국으로 가라고만 했다" 며 "동네 약국에는 약이 없어 대형 약국을 찾아 시내까지 나가야 한다" 고 말했다.

◇ 국.공립병원 비상진료 차질〓국립의료원은 전공의 1백50여명이 폐업에 동참, 의료 인력이 평소의 30%에 불과한데다 환자가 2~3배 가량 늘어 진료에 차질을 빚었다.

黃정연(48)응급의학과장은 "응급실에 공중보건의 10명을 긴급 투입하고 전문의를 전원 비상대기토록 했다" 며 "그러나 의료인력이 절대적으로 모자라 차질이 우려된다" 고 말했다.

한국보훈병원의 경우 국가유공자와 그 가족들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진료를 진행 중이나 일반환자들에 대해서는 진료접수를 받지 않았다.

원자력병원도 과장급들만이 진료를 맡았고 경찰병원도 정상진료가 이뤄지긴 했으나 전공의들이 폐업참가 여부를 놓고 회의를 하는 등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당초 정상 진료를 할 것으로 알려졌던 보훈병원도 외래진료는 하지 않고 기존 통원치료 환자들에게 처방전에 따른 약만을 판매하는 바람에 50여명의 환자들이 되돌아가기도 했다.

보건소도 일손달려 소동

◇ 보건소〓병.의원들의 집단폐업 여파로 시내 각 지역의 보건소에는 이날부터 24시간 비상진료 체제에 돌입한 가운데 이른 아침부터 몰려드는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특히 일부 환자들은 보건소가 문을 열기 전부터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서울 강남구 보건소에는 이날 오전부터 평소보다 2배 이상인 1백여명의 환자들이 몰렸고 동대문구 보건소에도 내과의 경우 4백여명이나 찾았다.

일부 구청에선 보건소에 환자들이 몰려들자 민원업무를 돕기 위해 공익요원이나 직원을 파견, 지원하기도 했다.

서울 도봉구 보건소에는 평소 1백50명이 찾았으나 이날 3백여명으로 늘어났고 팔이 부러지거나 얼굴이 찢어진 외과 환자들의 경우 인근 한일병원 응급실로 보내기도 했다.

간호사 金모씨는 "소아과 환자들이 특히 많이 찾고 있으며 의사 2명.간호사 2명으로는 감당하기 역부족" 이라고 말했다.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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