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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 잣대가 피아노 화음 깼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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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영창악기가 21일 끝내 부도를 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독과점 폐해가 우려된다며 삼익악기에 인수되는 것을 막은 지 12일 만의 일이다. 자칫하면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중소기업 하나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는 걱정도 나오고 있다. 현실로 나타나지 않은 독과점 폐해에 대한 '우려'가 현존하는 피아노 산업의 대외 경쟁력을 갉아먹는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공정위는 두 기업의 결합을 막기로 결정할 때 이미 영창악기의 유동성 위기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었고, 현재로선 결정을 바꿀 뜻이 없다고 한다. 공정위는 23일 삼익악기에 영창악기 지분 48.6%를 1년 안에 전부 팔라는 의결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 부도는 시장에서 내린 결론=영창악기는 4억6000만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났다. 삼익악기의 인수 좌절로 앞날이 불투명해진 영창에 대해 채권단이 더 이상 사정을 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영창의 자금난을 챙겼던 삼익악기도 손을 쓸 이유도, 방법도 사라졌다. 삼익악기 관계자는 "공정위 결정 이후로 영창을 지원할 방법이 없어진 상태"라며 "공정위 결정이 아니었다면 물품대금을 지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이번 부도가 삼익악기가 고의로 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공정위 결정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다. 삼익 측은 "영창이 부도나면 삼익은 150억원의 손해를 본다"며 고의 부도설을 부인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주선 연구위원은 "고의성 여부는 문제의 초점이 아니며 자신이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미래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회사에 자금을 지원할 기업은 없다"며 "공정위 결정에 따른 기업의 당연한 반응"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공정위가 독과점에 따른 영향이 훨씬 큰 SK텔레콤의 신세기 통신 인수나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는 허용하고, 그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피아노 시장을 문제삼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공정위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시장의 반발이 아니라 삼익악기 한 업체의 반발이라는 시각이다. 공정위 장항석 독점국장은 "공정위가 기업 인수.합병(M&A)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지적은 적절하지 않으며 이번 건은 충분한 검토를 거쳐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 영창악기 운명은=앞날을 예측하기 어렵다. 일단 삼익악기는 공정위에 이의 신청을 하고 법원에 화의신청을 할 계획이다.

공정위 결정 이후 영창의 내부 사정은 더 복잡해졌다. 이번 공정위 조치로 삼익은 영창 지분 48.6%에 대한 의결권을 상실하고 2대 주주인 외국계 펀드 트랜스미디어(14% 주식 소유)가 영창의 1대 주주가 됐다. 지난 20일 영창 악기의 과거 소유주 가족이 삼익악기에서 파견된 대표이사 등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트랜스미디어가 전 소유주 일가를 이용해 경영권 장악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영창의 영업망이 무너져 영창의 회생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 연구위원은 "영창이 도산하면 결국 피아노 시장은 독점 체제가 되고 다른 업체가 인수해도 과거처럼 영창과 삼익이 경합하는 관계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피아노 시장의 개방 상황 등을 감안해 공정위가 좀더 유연한 판단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박혜민.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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