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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36)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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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36. 시인의 행복

세상에서 단 하루 살고 온 죄수도 평생 감옥에 있는 동안 추억할 일이 모자라지는 않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은 쪼개보면 볼수록 애틋하고 서럽고 때로는 기쁘고 아름다운 일이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는 뜻이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찾아내 즐거워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우리에게는 너무 힘들고 지치고 짜증나는 일 투성이다.

종로 네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붙잡고 '행복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경우 '미친 사람 다 보겠네' 라는 시큰둥한 반응 아니면 '말도 마소, 나같이 힘든 사람은 조선 팔도에 없을 것이오' 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싶다.

탑골을 하는 동안 나는 진짜 자기가 부자라며 수줍게 웃는 사람을 보았다. 정희성 시인이다. 언제나 단정한 옷을 입고 늘 조용하며, 많이 빠진 머리카락 때문에 모직으로 된 모자를 눌러쓰고 점잖게 술을 마셨는데 어느 날 나를 은밀히 불렀다.

"복희씨! 나 말야 할말이 있는데. "

"예? 정말이세요. "

정희성 시인이 그렇게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부르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어서 나는 긴장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정말 비밀을 밝히는 것처럼 속삭이는 목소리로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말씀 하셨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 시가 두 편이야. 시 두 편이 내 가슴 위에 얹혀 있다는 것이 여간 든든한 게 아니야. 내가 정말 부자라고. "

나는 다소 당황하였다. 가슴께에 두둑한 현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또한 하도 은밀하게 말씀하셔서 순간적이나마 로맨틱한 말을 기대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시 두 편에 그렇게 나이 드신 분이 얼굴이 환해져서 행복할 수 있다니! 순간 그 말이 너무나 재미 있어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부자 되셨으니 한턱 내셔야겠어요. "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멋 없는 말이 없었다. '작품 쓰셨으니 얼마나 기쁘세요' 라든가, '시 한편 씌어지면 그렇게 기쁜가 보죠' 등등 좋은 말이 얼마나 많은가.

송구스럽다는 생각이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부럽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단 한가지 좋은 시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느끼는 것이 시인 아니던가!

그런데 사실 정희성 선생님에게서 로맨틱한 그 무엇을 기대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평소에 술을 드시면 거의 '민화투급' 이셨지만 가끔 우리를 놀라게할 만큼 노래를 그럴듯하게 불러주셨기 때문이다.

다소 고색이 창연한 트로트풍의 노래였는데 제목은 '남포동 부르스' 였고 노랫말은 상당히 고혹적인 것이었다. 또한 그 노래를 부르실 때는 순진한 청년이 좋아하는 연인을 위해 부르는 꼭 그런 모습이어서 듣는 사람들 모두가 정희성 시인의 어디에 그런 모습이 숨어있었을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희성 선생님은 천생 선생님이셨다. 지금도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대학에서 국문과 교수로 초빙된 일이 있었지만 응하지 않고 중등교육 현장을 지키신 것으로 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자신의 키를 재려하지만 정희성 선생님은 그런 키재기에는 관심이 없고 대신 맡은 일을 처리할 때는 꼼꼼하기로 소문이 난 김사인 시인도 머리를 흔들 정도로 정확했고 빈틈이 없었다.

그런 분도 발표되지 않은 시에 한 생애의 보람을 다 얹어 흐뭇해하며 부자라고 큰소리치는 일이 있었으니…. 세상은 얼마나 그윽한 것인가.

한복희 <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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