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코리아 드림] 上.외국인 노동자 인권침해 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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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툭하면 때리고, 도망갈지 모른다는 이유로 화장실 앞까지 따라와 감시를 합니다. 심지어 친구들에게 전화도 못하게 합니다. "

경기도 김포의 한 금속공장에서 일하던 인도네시아 산업연수생 푸지안토로와 에디가 지난해 말 부천 외국인노동자 상담소에 '도와달라' 며 보낸 호소문의 일부다.

한국에 온 지 2개월 된 스리랑카 출신 찬디마(27)는 지난달 하순 싸늘한 시체가 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경기도 포천의 한 섬유공장에서 작업 도중 화물운송 엘리베이트에 몸이 끼는 순간 그의 '코리안 드림' 은 산산조각났다.

경기도 성남시 태평2동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 지하 창고에는 이국 타향에서 불귀의 객이 된 외국인 노동자 29명의 유골함이 안치돼 있다.

성남 외국인노동자교회 김해성(金海性)목사는 "1주일 평균 세차례 정도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산재.질병 등으로 죽어간 외국인 노동자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고 말했다.

1995년 1월 네팔인 산업연수생 13명이 명동성당에서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고 울부짖으며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문제를 제기한 지 5년. 그러나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 감시.신분증 압류〓인도네시아 산업연수생 9명이 일하고 있는 부산 사상공단 J섬유공업사.

지난해 초 동료 한명이 이탈한 후부터 이곳 연수생들은 한국 직원들에 의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목욕탕이나 화장실에 갈 때도 한국인 직원이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안산 시화공단에서 일하는 한 필리핀 노동자(24)는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가 전무하다. 더 나은 근무조건을 찾아 도망갈 것을 우려한 회사에서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압수했기 때문이다. 여권이 없어 본국의 부모님에게 송금도 할 수 없고 신분증이 없어 외출도 불안하다.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는 현재 5만~6만명에 이르는 외국인 산업연수생 중 본인이 여권을 갖고 있는 경우가 1%도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폭행〓경기도 남양주시 한 철재가구 제작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던 방글라데시인 아우왈 삼손(28)은 지난달 중순 한국인 동료로부터 쇠파이프로 맞아 머리 세군데가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실수로 이 직원의 신발에 자장면을 엎질렀다는 게 폭행 이유였다. 그러나 불법체류 신분이라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치료비만 받고 쫓겨났다.

지난해 6월 안산 D산업사에서 일하던 인도네시아인 푸르노마는 할당된 작업을 끝내고 자국 동료를 도와주다 작업반장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한 중소업체 사장은 "뺨을 때리는 정도를 문제삼는다면 어떻게 일을 시키겠느냐" 고 말할 정도로 작업 중 폭행이 빈발하고 있다.

◇ 임금체불〓경기도 양주군의 한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스리랑카 부부 미할(32).닐란티(28.여)는 10개월치 월급을 받지 못했다. 사장은 사정이 나아지면 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던 중 미할은 오른손 손가락 4개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해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겼으나 1천여만원의 체불임금 중 7백만원을 떼였다.

지난 11개월간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 이 접수한 8백31건 중 임금체불이 3백80건으로 절반 가량을 차지했을 정도다.

◇ 강제적립금〓인도네시아인 리붓은 2년여 동안 기본급의 80%에 해당하는 30여만원을 매달 강제적립금으로 냈다. 리붓은 한국에서 더 돈을 벌고 싶어 98년 말 직장을 이탈했다.

6개월 뒤 귀국하려고 사후관리업체 B사에 찾아가 적립금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산업연수과정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결국 리붓은 친구의 도움으로 항공권을 구입해 무일푼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중기협은 지난 96년 연수생 이탈을 방지할 목적으로 '연수생에게 목돈을 만들어 귀국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는 명목으로 기본급의 50% 이상을 은행에 강제적립토록 하고 있다. 99년 8월 말 현재 현장이탈 등 이유로 산업연수생이 찾아가지 못한 적립금은 38억원에 이른다.

◇ 산재〓지난해 6월 울산시 D사에 2년6개월째 근무하던 인도네시아 연수생 블루시아가 기숙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거의 매일 잔업에 시달렸기 때문에 노조는 과로사로 추정하고 산재보험 신청을 하려 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사후관리업체를 통해 유족측과 합의해 위로금을 주고 며칠 뒤 시신을 본국으로 보냈다.

99년 국정감사에서 노동부가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98년부터 99년 6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외국인 노동자의 산재 요양신청자는 1천1백55명.

그러나 업체들이 산재신청을 기피하고 있어 실제 발생건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동법상 불법 체류자라도 산재보상은 보장돼 있지만 업주들은 산재요율 인상을 이유로, 당사자들은 적발시 불법체류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쉬쉬하고 있다.

이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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