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실체를 벗긴다] 2.세계최대 제약사 머크의 지놈 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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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놈혁명의 최대 수혜자는 누가 될까.미국정부도,셀레라도 아니다.그들은 단지 염기서열을 찾아내는 노역만 제공할 뿐 황금 노다지는 제약회사들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지놈정보를 활용한 돈벌이는 정작 신약개발에 있기 때문이다.작년 한해만 3백27억달러(약 40조원)의 매출을 올린 세계최대의 제약회사 머크(Merck)는 94년 제약기업 최초로 자체 인체지놈연구소를 설립해 염기서열 분석에 나서고 있다.지놈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머크의 전략을 살펴본다.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공항에서 차로 달려 40분 거리에 위치한 소도시 화이트스테이션. 머크 본사는 사슴이 차도로 뛰어들곤 하는 이곳 한적한 숲 속에 있지만 사진촬영금지는 물론 가방도 맡기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출입제한이 철저하다.

이 연구소의 캐서린 무노즈 박사는 "암과 같은 난치병 극복이나 유전자조작을 통한 맞춤형 치료는 인체지놈사업이 완성돼도 가까운 시일 내엔 불가능하지만 신약개발에서는 상당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 며 인간지놈 완전해독을 계기로 제약회사들이 신약개발에 승부를 걸고 있음을 강조했다.

인체지놈사업으로 밝혀진 것은 염기서열이란 벽돌의 위치와 순서일 뿐 특정벽돌이 인체 내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밝히려면 수십년이 걸린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통상 신약은 새로 합성한 수백만가지 신물질을 대상으로 시행착오를 거듭해 화학물질을 합성해내고 효능과 부작용 검증을 위해 수천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평균 15년의 기간과 4억달러 정도의 비용을 들여야 신약 하나를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머크연구소 공보실장 재닛 스키드모어는 "위장장애없는 진통소염제 바이옥스가 미 식품의약국(FDA)의 공인을 얻기 위해 제출한 서류만 5만건 이상이며 기침 부작용을 줄인 고혈압치료제 코자는 안전성 입증관련서류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보다 높다" 며 기존 신약개발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그러나 지놈 혁명은 신약개발 기간과 비용을 절반 이상으로 줄일 전망이다. 약물의 공격목표가 되는 단백질의 구조를 유전자란 설계도만 보고 알아낼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는 에이즈를 불치병에서 난치병으로 격하시킨 머크사의 획기적인 에이즈치료제 크릭시반. 에이즈바이러스의 증식에 필수적인 단백분해효소란 단백질의 작용을 차단해 에이즈를 치료한다.

크릭시반은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약물 가운데 가장 합성?까다로운 것으로 악명높다. 이유는 공격목표인 에이즈바이러스 단백분해효소의 구조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 89년 머크연구진에 의해 처음으로 3차원 구조가 규명됐다.

이때 이용된 방법은 엑스선회절과 핵자기공명촬영 등 첨단기법이다. 외부에서 빛을 쪼여 촬영한 수백만장의 영상을 분석해 단백분해효소의 구조를 간접적으로 알아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단백분해효소의 지놈 정보가 밝혀지면 간단히 해결된다. 집 안의 구조를 알기 위해선 설계도만 얻으면 되지 굳이 항공촬영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인체를 구성하는 단백질 중 구조가 밝혀진 것은 1%인 1천5백개에 불과하다. 신약 개발을 위해선 나머지 99%의 단백질 구조를 밝혀야 하는데 이때 지놈 정보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

머크를 비롯한 거대제약기업들이 지놈 기술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전자파괴쥐의 확보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이다. 머크는 98년 유전자파괴쥐 기술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벤처회사 렉시콘에 8백만달러를 주고 기술협정을 맺었다.

렉시콘이 생산한 1백여종의 유전자파괴쥐를 통해 유전자 염기서열이 생체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밝혀내고 이를 신약개발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머크는 렉시콘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용한 유전자파괴쥐를 독점적으로 확보하는데 전력투구하고 있다.

인체 지놈사업의 완성으로 30억쌍의 염기서열이 모두 완성돼도 이들이 각각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지 알지 못하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신희섭 교수팀이 개발한 3종의 유전자파괴쥐도 최근 머크사로부터 공동사용에 대한 제의를 받았다.

신교수는 "내가 개발한 유전자파괴쥐는 통증에 관여하는 칼슘을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통증억제제 신약개발에 크게 기여하리라고 보고 있는데 어떻게 머크사가 알았는지 놀랄 뿐" 이라고 털어놨다.

머크의 최종 목표는 맞춤형 약물의 탄생이다. 지금까지 약물은 인종간.개체간 유전적 특성을 무시한 획일적 처방이었다. 똑같은 페니실린이라도 누구에겐 세균을 효과적으로 박멸하지만 누구에겐 치명적인 부작용을 유발한다.

그러나 페니실린 과민체질을 지놈 정보를 통해 미리 알아내고 이를 피할 수 있는 페니실린을 따로 제작해 처방한다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머크연구소 아트 카우프만 박사는 "지놈 혁명을 통해 획득한 개인별 유전정보를 이용해 최대의 효능과 최소의 부작용을 지닌 맞춤형 약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차세대 제약산업의 목표가 될 것" 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체질에 맞는 아스피린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뉴저지주 화이트스테이션〓홍혜걸 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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