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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총통 새대만] 下.국민당은 살아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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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쑹추위(宋楚瑜)와 롄잔(連戰)-.지난 3월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陳水扁) 총통과 맞섰던 주역들이다. 두 사람은 끝내 20일의 취임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 외유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덩후이(李登輝)전 총통은 이양식에서 "새 정부의 승리를 축하하며, 성공을 축원한다" 고 말했다. 마치 후계자의 총통 취임을 바라보듯 시종 흐뭇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중국시보 등 대만 언론들은 20일 오전 8시 총통부에서의 이양식을 보도하며 "마치 친자식에게 정권을 물려주듯,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였다" 고 전했다.

신임 陳총통도 李전총통에게 "고맙다. 우리는 당신이 정말 고맙다" 는 말을 건넸다. 진심이 흠뻑 배어 있는 표현이다. 그뿐 아니다.

李전총통은 여전히 총통 신분이었던 지난 15일 타오위안(桃源)시내 총통 별장으로 민진당 소속 입법의원 10여명을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타이베이 시장을 노리는 민진당의 선푸슝(沈富雄)의원에게 "만일 당신이 차기 타이베이 시장에 출마한다면 표를 모아주겠다" 고 말했다.

당(黨)이 아니라, 인물을 중시하기 때문' 이라는 토를 달았다. 그러나 국민당엔 분명한 해당(害黨)행위다.

宋이 이끄는 친민당(親民黨)소속 친후이주(秦慧珠)입법위원은 20일 오후 기자에게 "리덩후이는 결코 죽지 않는다" 고 강조했다.

"정치적으로 李와 陳은 부자지간이다. 李는 陳을 통해 계속 살아남을 것" 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행정원장.외교.국방.재정부장과 대륙위원회 주임.중앙은행 총재 등 핵심 요직을 포함, 새 정부 초대 내각의 40% 정도가 리덩후이 계열의 국민당 출신이다.

李전총통은 선거전부터 정치.사상적으로 陳총통을 지원해왔다. 일부에선 자금지원설까지 거론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대목은 李전총통이 '대만내 민주화' 에 차지하는 비중이다. 민주화에 대한 그의 첫 업적은 '공포정치.철권통치.테러정치' 의 청산이다.

1949년 2월 28일 발생한 이른바 '얼얼파(二二八)사건' 을 모르는 대만인은 없다.

국민당 소속 관원이 불법 담배판매를 단속한다며 어린 소녀를 타살한 사건을 계기로 전 대만인이 봉기하자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건이다.

공식적인 사망자수만 4천명이 넘었다. 진상조사위는 1만5천명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공포가 대만을 휩쓸었다. 대만 출신 지식인.정치인들이 밤낮없이 끌려가 구타당하고 살해되는 경우가 속출했다.

그러나 장징궈(張經國)총통의 병사로 88년 1월 제7대 총통에 취임한 李전총통은 이 공포를 털어냈다.

동시에 대륙에서 선출된 종신직 입법위원을 퇴직시키고, 전 입법위원을 대만인이 직접 뽑도록 바꿨다.

타이베이 시장.대만성장도 모두 직선으로 돌렸다. 96년엔 9대 총통선거를 직선으로 치러냈다.

이 때문에 李전총통에 대한 대만인들의 존경심은 대단하다. 주석에서 물러나고도 국민당을 좌우할 영향력을 누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陳총통이 李전총통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새 정권은 李전총통을 고리로 삼아 국민당과 연결된 사실상의 '연립정권' 이라 할 수 있다. 대륙과의 통일을 주장하는 宋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는 한 두 사람의 공조는 깨지지 않을 것이다.

타이베이〓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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