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아프리카의 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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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체체파리가 옮기는 수면병은 매우 고통이 심한 질병이다.

처음 발병하면 피부가 예민해지고 관절에 통증을 느끼는 정도지만, 몇주일 지나 병원체가 뇌에 침투하면 극심한 환각에 시달리고 피부에 어떤 것이 닿는 것도 견딜 수 없게 돼 스스로 똥통에 뛰어들기까지 한다.

마지막엔 모든 감각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죽음에 이른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맹위를 떨치던 수면병은 50년 전 거의 퇴치됐던 병이다. 오랜 기간 유럽 식민지배자들과 인도주의자들의 위생 향상 노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유럽인이 물러간 후 독립국가들의 위생정책이 낙후된 가운데 근년 내전 등으로 주민들의 생활조건이 열악해지면서 수면병이 다시 창궐하고 있다. 수면병뿐 아니라 결핵.말라리아 등 옛 시대의 질병이 돌아오는데 에이즈까지 겹쳐져 아프리카인을 괴롭히고 있다.

아프리카가 '질병의 대륙' 으로 전락하는 결정적 이유는 가난이다. 세계 인구의 10%를 가진 아프리카가 약품에 쓰는 돈은 전세계의 1%도 안된다. 제약회사들은 아프리카의 질병을 위한 약품개발보다 비아그라나 발모제 개발에 힘을 더 쏟는 실정이다.

수면병이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수면병에는 강력한 치료제가 두 가지 있다. 멜라소프롤은 1930년대에 개발된 것인데 부작용이 커서 의사들도 꺼린다.

오디닐은 원래 항암제로 개발됐다가 수면병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십여년 전 우연히 발견됐다. 그런데 오디닐이 항암제로 효과가 없다고 판명되자 제약회사가 생산 중단을 결정했다.

회사측은 오디닐의 특허권을 세계보건기구(WHO)에 양도했다. 그러나 WHO는 약을 염가에 공급할 다른 회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더 기막힌 것은 오디닐 원료로 얼굴의 털을 없애는 약을 만드는 방법이 개발돼 수요가 늘어남으로써 원료값 앙등이 예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약업은 막대한 연구개발비가 드는 산업이다. 수백만달러 개발비를 들이고도 상품화에 실패하는 일이 다반사다. 적어도 연 매출 2억달러는 바라봐야 신약(新藥)개발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 제약업계의 상식이다. 부자나라 사람들을 더 잘살게 해주는 약이라면 투자가치가 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무슨 장사를 바라볼 것인가.

제약업자들의 도덕성만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제약업계는 근년 인수.합병이 가장 활발했던 분야의 하나다. 업자들의 생존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이윤 극대화를 향해 일로매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강박이 경영자들을 짓누르고 있다.

'의료인권' 개념에 대부분의 제약업자들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실현을 위해 자기네만 희생당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과연 세계기구와 각국 정부들은 상황개선을 위해 자기 몫의 최선을 다했는가. 책임회피로만 여길 수 없는 뼈아픈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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