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링에서 한 대 맞으면 ‘넌 죽었어’ 하며 달려들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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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가 자신이 운동하는 서울 문래동 거인체육관 근처 공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트레이닝복 대신 외출복을 입고 니트 모자를 쓴 김주희는 “이 정도도 모처럼 멋을 낸 것”이라며 웃었다. [이호형 기자]

2009년은 프로복서 김주희에게 뜻깊은 해였다. 지난 9월 5일 안양에서 열린 여자국제복싱협회(WIBA)·여자국제복싱연맹(WIBF)·세계복싱연합(GBU) 라이트플라이급 3개 기구 통합 세계 타이틀매치에서 태국의 파프라탄 룩사이콩(20)을 4라운드 TKO로 눌렀다. 세계 여자 프로복싱 사상 첫 5개 기구 챔피언에 오른 쾌거였다. 덕분에 김주희는 WIBA와 WIBF에서 올해의 우수선수에 선정됐고, 지난 4일에는 GBU 올해의 선수로도 뽑혔다.

지난 8일 서울 문래동 거인체육관에서 김주희를 만났다. 그는 세계 최고의 주먹 이전에 욕심 많은 스물셋 청춘이었다.

#“한 체급 내려 또 다른 챔피언 도전”

김주희는 중학생이던 1999년 복싱에 입문했다. 집안이 어려워 네 살 위인 언니가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김주희는 방과후 주유소 옆 거인체육관에서 놀다가 언니와 함께 집에 돌아오곤 했다. 재미 삼아 복싱 동작을 흉내 내던 김주희를 정문호 거인체육관 관장은 눈여겨봤다. 정 관장은 “처음 샌드백을 치는 걸 보고 ‘이거다’ 싶었다. 국내엔 여자복싱이 없었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를 권유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김주희는 2002년 이인영과의 한국 플라이급 초대 타이틀전에서 유일한 패배를 당했지만 서서히 경력을 쌓아 나갔다. 2004년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결정전에서 멜리사 셰이퍼(미국)를 꺾고 여자 프로복싱 사상 최연소 세계챔프(18세11개월)에 올랐다. 2007년에는 세계복싱협회(WBA) 타이틀, 2008년에는 WIBA 타이틀을 따냈고 올해는 3개 기구 통합 챔피언이 됐다. 복싱 기록 사이트인 ‘복스렉’에서 매긴 통합 랭킹은 라이트플라이급 2위. 김주희는 “타이틀 방어도 어렵지만 계속 도전하고 싶다”며 내년 2월에는 한 체급을 내려 서울에서 미니플라이급(47.6㎏) 통합 챔피언에 도전할 뜻을 드러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는 독종

김주희가 세계 최강이 된 비결은 승부근성과 노력이다. 김주희는 “링 위에서 펀치를 맞으면 당연히 아프다. 하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다. 한 대 맞으면 ‘넌 죽었다’ 하고 두 대를 때릴 생각으로 달려든다”고 말했다. 정 관장은 김주희가 발가락 골수염 수술을 받은 뒤 쉬라고 했는데도 깁스를 풀고 줄넘기를 했던 ‘독종’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오전 5시30분부터 8시까지 로드워크를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15∼18㎞를 달린다. 낮에는 웨이트트레이닝, 저녁에 전술훈련을 하다 보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 대부분의 여자 복서가 생계 유지를 위해 다른 일을 하는 것과 달리 김주희는 오로지 복싱에만 매달린다. 5년째 배우는 요가도, 허리가 좋지 않아 시작했던 수영도 모두 복싱을 위해서였다. 그러다 보니 ‘얼짱 복서’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10년 동안 남자친구도 없다.

김주희의 대전료는 5000만원이지만 올해 딱 한 경기밖에 못 했다. 그나마 경비와 커미션 등을 제하면 손에 쥐는 돈은 절반 정도다. 한 스포츠용품 업체에서 받던 스폰서도 얼마 전 끊어졌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진 못했어요. 그래도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는 아버지 치료비를 위해 열심히 해요. 제가 가장이니까요.”

#“꾸미고 싶지만 시간이 아까워요”

인터뷰를 위해 나타난 그의 옷차림은 평범했다. 화장기도 전혀 없었고, 액세서리는 목걸이 하나뿐이었다. 김주희는 “오늘 사실 좀 꾸민 거예요. 평소에는 트레이닝복 차림이거든요”라며 웃었다. “친구들 한테는 ‘너네들 정말 아가씨 같다’고 말해요. 화장도 하고 예쁜 옷 입은걸 보면 저도 여자니까 그러고 싶죠. 예쁘다는 얘기 들으면 기분도 좋고요. 하지만 정말 하고 싶은 게 복싱이니까 그런 시간이 아까운 거죠.”

김주희는 내년 중부대 대학원 교육학과에 진학한다. 자신의 꿈인 교수가 되기 위해서다. “총장님과 관장님을 비롯해 많은 분이 도와주십니다. 런던 올림픽에는 여자 복싱이 정식 종목이 됐잖아요. 기회가 된다면 지도자도 되고 싶고, 경기 해설도 하고 싶어요.” 하루 2~3시간 자면서도 영어 공부를 하고 아마추어 복싱 지도자 2급 자격증 시험까지 준비했다는 김주희. 그의 소망이 하나둘 영글어 간다.

글=김효경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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