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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코펜하겐 기회’를 놓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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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왕따’ 현상 연구자에게 들은 얘기다. ‘투’는 교실 내 근육질연결망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사람·기관이 그물망처럼 얽힌 사회에서 권력만큼이나 위치가 중요한 경우가 있다. 자체 파워는 세지 않지만 연결망의 중앙에 위치해 힘을 받는 것이다. 몇 년 전 국내 학자들이 충무로 배우 연결망을 조사한 적이 있다. 최다 영화 출연자는 신성일이었지만 허브는 따로 있었다. 명품 조연인 박용팔이었다. 다른 유명 배우들과 공동 출연을 많이 한 덕분에 한복판에 설 수 있었다.

네트워크 연구자들은 영향력을 권력과 구분한다. 그리고 ‘중앙성’을 수치화해 이를 측정한다. 사이·인접·위세 중앙성 같은 항목을 통해 허브를 가려낸다. ‘지구 살리기’가 한창인 코펜하겐 기후회의를 중앙성의 틀을 대고 들여다보자. 각국은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다. 이 연결망에서 권력자는 미국·중국·유럽연합(EU)이다. 그렇다면 중앙성이 큰 나라는 어디일까.

“외국인들이 한국 정보에 큰 관심을 보인다.” NGO인 ‘기후변화센터’ 나용훈 팀장의 현지 전언이다. 회의장·프레스센터가 위치한 코펜하겐 벨라센터에는 수백 개의 부스가 설치돼 있다. 그런데 한국 부스를 찾아와 입장을 묻는 외국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한번은 멕시코 NGO 회원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온실가스 감축이 민감한 문제여서 국내에서 말이 많다. 한국은 기후회의 직전에 자발적 감축 의사를 공표해 놀라웠다. 한국의 포지션은 다른 나라와 다른 것 같다.”

멕시코인의 말처럼 기후 협상에서 한국의 위치는 독특하다. 우리를 중심으로 ‘세 개의 다리’가 교차하고 있다. 담론·이해득실이 충돌하는 중앙에 서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다리는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교량이다. 개도국 입장은 간단명료하다. 과거에 선진국이 산업화하면서 내뿜은 가스 때문에 오늘 이런 결과가 생겼는데 왜 공동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선진국은 후진국의 볼멘소리를 무마해 공동 참여의 틀을 만들려 한다. 두 진영의 중간에 한국이 위치한다. 선진국은 모든 국가의 의무 감축을, 후진국은 선진국만의 의무 감축을 각각 주장한다. 의무 감축을 받아들이면 국제법 통제를 받는다. 한국은 두 입장을 아우르는 ‘등록부’ 방식을 제안해 놓고 있다. 각 나라가 감축 계획을 등록 명부에 적어 놓고 상호 검증을 하며 실천해 나가자는 것이다.

두 번째는 녹색과 성장을 잇는 다리다. 지구온난화의 해법을 놓고도 두 견해가 충돌한다. 온실가스를 강제로 줄여나가야 한다는 녹색파가 있다. 그 반대편에 온실가스 감축보다는 대체에너지 기술을 개발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성장파가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 정부는 지난해 광복절 때 국정 목표로 녹색성장을 밝혔다. 둘의 조화를 선언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세 번째는 미국·일본과 중국을 잇는 다리다. 미국·일본은 감축 대열에 중국을 끌어들이려 애를 쓰고 있다. 중국은 라이벌인 두 나라의 요구를 간섭으로 받아들인다. 미·일은 한국이 중재·설득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비(非)의무감축국 중 가장 모범적인 감축 답안을 써낸 한국의 제안이라면 중국도 경계심을 풀 것이라는 지적이다.

개도국과 선진국, 녹색파와 성장파, 미·일과 중국 사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영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상반된 두 진영 모두에서 배척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 개의 다리는 우리에게 분명 기회다. 우리가 ‘중앙성’을 활용할 전략·해법을 갖고 있다면 녹색성장 시대의 허브 국가로 올라설 수 있다.

코펜하겐 기후회의는 역대 환경 이벤트 중 최대 흥행 성적을 거둘 조짐이다. ‘지구 살리기’라는 이상적인 주제에 100개국 이상의 정상이 참석한다. 우리 정부의 공식대표단만도 100명이 넘는다. 이명박 대통령이 간다면 규모는 더 커질 것이다. “많이 갔으니 낭비”라고 무조건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관건은 무엇을 보고 느끼느냐다. 이번 회의를 계기로 저탄소 시대는 점프대에 올라 활강을 준비하고 있다. 정부 대표단은 우리 앞에 놓인 세 개의 다리를 활용할 지혜와 비전을 갖고 돌아오라. 코펜하겐 찬스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규연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