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총통 새대만] 上.열풍부는 민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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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허물 벗기' - 대만의 오늘을 지배하는 문법이다.

천수이볜(陳水扁)신임 총통의 취임식을 앞두고 대만에서는 뿌리 깊은 악습과 잘못된 관행을 털어내는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20일의 총통 취임식을 앞두고 변화하는 대만의 모습을 세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타이베이(臺北)시 둔화난루(敦化南路)와 스민다다오(市民大道)가 만나는 거리. 볜마오궁창(扁帽工場)이란 간판을 단 가게 앞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새 총통 기념품을 사려는 줄이다.

천수이볜의 모습을 새긴 티셔츠.모자.바지는 물론 인형.배지.공 등 각양각색의 기념품이 그득하다.

현장에서 만난 대만정치대 학생 장후이(張慧.20)는 "동생과 오빠의 부탁으로 티셔츠와 모자를 샀고 내가 가지려고 인형을 하나 샀다. 10분씩 줄을 서서 기다린 보람이 있다" 고 말하며 즐거워했다.

가게주인 쉬원더(徐文德)는 "요즘 하루평균 1천여명의 손님들이 밀려들고 있다" 고 말했다. 기쁨을 감추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총통 기념품을 파는 곳은 이곳만이 아니다. 타이베이 시내 곳곳에 임시 매장이 널려 있고 기존의 옷가게나 음반가게들도 앞다퉈 천수이볜 코너를 설치했다.

그러나 수도 타이베이의 열기는 약과다. 천수이볜의 고향인 남부 타이난센(臺南縣) 관텐샹(官田鄕) 시좡춘(西庄村)에는 연일 수천명의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주로 관광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몰려드는 방문객들은 천수이볜의 생가와 성장지를 돌아보느라 분주하다. 때문에 방 세개가 있는 초라한 생가를 한번 구경하려면 최소 30분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1천호 남짓한 시좡춘의 주민들이 이 틈을 놓칠 리 없다. 천수이볜떡(扁蛋)이니 천수이볜차(扁眞珠茶)니 하면서 새 총통의 이름을 딴 음식들을 만들어 관광객을 끌고 있다.

陳과 한 마을에서 자랐다는 한 아주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즐겨먹었다는 천수이볜 음식상을 차려내 팔 정도다.

이같은 천수이볜 열기는 이곳 민의조사기관의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대선 당시 陳의 득표율은 40%를 약간 밑도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산수이(山水)민의조사공사 등 대만의 여론조사 기관들이 최근 발표한 자료는 그의 지지율이 80%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우리도 문민정부나 현 정부의 집권 초반기엔 대통령 지지율이 90%를 넘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만 내 천수이볜 열기는 일종의 종교적 열정까지 느껴진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반세기에 걸친 집권으로 국민당이 다져놓은 기반이 아직도 단단하고, 여전히 독립을 경원하는 세력이 시퍼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중국정치문제연구소의 예밍하오(葉銘浩)교수는 "대만인들은 그들의 두려움을 천수이볜에 대한 열기로 지우려 한다" 고 설명했다. 중국의 침략위협이 생생하고 두려운 만큼 새 총통에 대한 심리가 커진다는 얘기다.

어차피 중국이 싫어하는 후보가 대만의 총통이 됐다면, 그를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천수이볜 기념품 열풍과 80%의 지지율을 읽는 또 다른 독법(讀法)일지도 모른다.

물론 대만인들의 마음 밑바닥엔 국민당 일당지배를 마감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 민주주의 클럽에 가입했다는 자긍심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타이베이〓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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