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한 해 마지막 달을 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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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래저래 바쁜 12월이지만 요즘 내가 쥐고 붙들고 있는 생각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 하나는 한 수행자의 일화다. 한 수행자가 세연(世緣)을 끊고 정진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그래서 바랑을 싸 등에 지고 낙담하여 절을 떠나오던 중 우연히 움푹 파여 있는 돌을 보게 되었다. 돌 위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똑, 똑 떨어져 내리는 작고 가벼운 물방울에 의해 깊게 파여 있는 돌을 보고 무릎을 치곤 절로 돌아갔다. 그러나 역시 수행이 시원찮았다. 다시 바랑을 싸 절을 떠나오다가 큰 나무 아래 주저앉게 되었는데 우연히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곤 또 한번 무릎을 쳤다. 나뭇가지 위에 한 마리 새가 앉아 있었고, 새가 앉은 자리가 반들반들 윤이 났던 것이다. 새가 내려앉고 날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나뭇가지 껍질은 매끄럽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수행자는 다시 절로 돌아갔다.

또 한 가지는 시인 폴 발레리의 수첩에 관한 것이다. 발레리는 새벽에 일어나 수첩에 글을 써 내려갔는데 그 분량이 3만 쪽에 달했다. 발레리는 이 수첩을 일러 “나의 모든 노트, 썩지는 않지만 불타기 쉽고, 그리고 분실해 버린다면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는 나의 재산”이라고 했고, “하루하루의 시간을 조직하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발레리는 이 수첩에 남긴 글에서 “무(無)의 앙상한 상실(喪失)의 날들. 나의 가치는 어디로 가버렸다는 것인가”라며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인간들이 하는 짓들이 얼마나 비참한 것들인가! 모든 역사는 내가 보는 바로는 어처구니없는 우행(愚行)의 기록”일 뿐이라던 발레리가 이처럼 수첩에 글 쓰는 일을 고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연만이 인간을 만든다고 믿었던 그는 그 심연의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매일 새벽 수첩에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발레리의 수첩은 한 수행자가 우연히 본 움푹 파여 있는 돌과 반들반들한 나뭇가지의 충격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물론 발레리의 그것과는 용도가 다르지만 나는 나의 수첩을 뒤적뒤적 넘겨보았다. 대개는 약속들이 빼곡하게 메모되어 있었다. 되풀이되지 않았지만, 또 크게 보면 되풀이된 일들의 기록이었다. 어느 날부터는 반복되는 어리석은 일을 돌아보기 위해 혼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해두기도 했다. 열두 달째, 그리하여 한 해를 그렇게 살아온 것이었다.

약속의 흔적으로써 내 한 해 살림의 윤곽을 대충 되짚어 볼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나를 만난 사람들이 가졌을 마음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인 마쓰오 바쇼는 “모란꽃술 깊은 곳에서 기어 나오는 벌의 아쉬움이여”라고 썼는데, 내가 염려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꿀과 향기를 찾아온 인연들에게 나는 향기 없는 모란꽃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고 가는 한 해가 여객(旅客)이라지만 매 순간 삶을 스스로 돌아보고 바로 세우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기만 하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