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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법의 날'에 생각하는 사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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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금 일본에서는 사법개혁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 논의는 지난해 7월 내각 산하에 설치된 사법제도개혁심의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2001년 7월까지 최종보고서를 내도록 예정돼 있다.

우리의 사법제도가 일본 것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점에 비춰 일본에서의 사법개혁 논의는 그저 남의 일만은 아니다.

몇 가지 점에서 일본의 사법개혁 논의는 주목할 만하다. 우선 이번 논의가 일본 재계의 총본산이라고 할 '경제단체연합회' 에 의해 촉발됐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흔히 게이단렌(經團連)으로 약칭되는 이 단체가 독자적인 사법개혁안을 제시하자 이에 대응해 내각 차원에서 사법개혁에 나서게 된 것이다.

경제단체인 게이단렌이 무슨 까닭으로 사법개혁에 적극 나선 것인가. 그 배경은 이 단체의 주장 내용으로 보아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정경유착에 기초한 경제구조로는 더 이상 국제화에 대처할 수 없으며 투명성과 예견 가능성을 갖춘 법제도의 완비가 기업의 이익 보호에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규제완화 후의 기본적 인프라로서의 사법의 정비.확충' 을 기본관점으로 제시하고 법조인구의 증대, 법조 일원화, 대학 법학교육의 혁신 등 다양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일본 사법개혁 시도의 또다른 특징은 논의가 매우 광범하고 심층적이라는 점이다. 사법제도개혁심의회는 특히 사법제도에 대한 국민의 접근 또는 참여의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영.미의 배심제도 도입까지 검토하고 있고, 미국식 로스쿨을 변형한 '일본형 로스쿨' 설립안을 놓고 본격적인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절차적으로도 직접 이해관계 당사자를 배제한다는 뜻에서 현직 판사.검사를 심의회 구성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등 신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론조성에 앞장서는 법학교수.변호사들의 주도로 '사법개혁' 이라는 월간지까지 발간하는 것을 보면 개혁의지가 예사롭지 않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도 지난해 말 대통령 자문 '사법개혁추진위원회' 가 방대한 내용의 종합보고서를 낸 바 있다. 지난 4.13총선 때문에 관심이 끊어지고 말았지만 이 보고서에는 괄목할 내용들이 담겨 있다.

공무원 직무에 관한 모든 범죄에 재정신청 대상을 확대하는 등의 공정하고 신속한 권리구제, 모든 구속피의자에게 국선변호인을 선임하는 등의 법률서비스의 질적 향상, 검찰제도와 관련해 검사가 상사의 부당한 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명시적 규정을 두는 등의 법조의 합리적 개선, 최소한 5년 이상 경력을 지닌 법조인 중에서 판사나 검사를 임용하는 법조일원화를 비롯한 법조인 충원제도의 개선 등.

이들 개혁안이 그대로 실현된다면 상당한 사법발전을 가져올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본에 비하면 그 폭과 깊이에서 미흡한 감이 있다.

특히 법학교육 학제에 관해서는 견해가 분분한 만큼 더 검토가 필요하다. 이것과는 별개로 널리 공감이 이뤄져 있는 내용들은 지체없이 입법화해야 할 것이다.

마침 5월 1일은 법의 날이다. 우리 사회에서 법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일본 사법제도개혁심의회 위원장인 사토 고지(佐藤幸治)교수의 말을 떠올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일본은 법 '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하여' 지배돼 왔다. " 이 말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법이 단순한 지배수단이 아니라 자의(恣意)를 억제하는 자율성을 지니려면 무엇보다 사법이 바로서야 한다.

사법이 바로서려면 사법제도 개혁과 함께 법조인의 의지가 관건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당장의 관심사로 선거법 위반사범에 대한 재판이 주목되고 있다.

대법원은 이미 당선무효 형량의 선고도 마다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 공언에 기대를 건다. 선거재판의 결과는 정치발전만이 아니라 사법의 미래를 가늠할 시금석이 될 것이다.

양건 <한양대 법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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